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라디아서 3:1-14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다 보면 자주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자꾸 “믿으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으라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곧 우리 크리스천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며, 믿는 자들은 반드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내용”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신자가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집(house of spiritual lif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의 어떠함에 따라서 어떤 집은 기초가 튼튼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울 것이며, 어떤 집은 기초가 약하고, 협소하며, 초라할 것입니다. 내용이 없거나 빈약한 믿음이란 사실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는 그 본질이 견고하고, 영원하며,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바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들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의 집”의 뼈대가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약속)”과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와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우리 믿음의 내용을 요약하면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약속)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졌다는 복음”입니다. 이 내용 중 어떤 것이 빠져 있거나, 이로부터 벗어나있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으며,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 믿음의 도리에서 벗어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하며, 그들 속에 다시 믿음의 집을 세웁니다.
믿음의 내용은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약속)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마침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의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계획하시고, 약속하시고, 이루신 구원의 역사입니다. 여기에 우리 사람들이 기여한 바는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행하시고, 완성하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내 삶에 임하도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듣고 믿음”과 “율법의 행함”을 대조합니다. “듣고 믿음”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은혜의 역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율법의 행함”은 내 손으로 그 구원을 이루어보겠다는 것입니다. “듣고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seeing)”입니다. 반면에 “율법의 행함”은 “보여주는 것(showing)”입니다. 심지어 그 보여주는 것조차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에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위선(외식 - hypocrisy)일 뿐입니다. 구원이란, 또는 그냥 사람들의 말로 “성공적인 삶”이란 내가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약속)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공은 오직 “듣고 믿음”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의 중요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는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약속)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따로 떼어놓으면 그 의미가 퇴색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언급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리고 이어서 따져 묻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갈라디아 성도들이 듣고 믿었을 때, 이로 인해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은 것”이 갈라디아 성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듣고 믿음으로 받은 “다른 복”이 있을까요? 최소한 오늘 본문만을 놓고 보면 다른 복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듣고 믿었을 때, 이들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믿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받은 복의 “전부”입니다. 심지어, 4절에 따르면, 이 축복을 받은 후 갈라디아 성도들은 “많은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본문에는 이것이 어떤 괴로움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를 “믿음을 지키기 위해 겪어야 했을 고난”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이 듣고 믿음으로 받은 “성령의 임재하심”은 그 자체로 말할 수 없이 크며 어떤 다른 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라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어려운 괴로움이라도 기쁘게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님께서 이렇게 수고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구원인 것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에스겔서 36:24-27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으셔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며 또 성령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즐겁게 행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 약속을 가리켜 “성령의 약속”이라고 합니다. 이 약속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5). 또 이 약속은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36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리고 마음이 찔린 사람들에게 촉구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행전 2:38-39).
하나님의 “성령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게 못박히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4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것이 바로 “성령의 약속”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길을 열어놓으신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또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오직 이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은혜를 “생명처럼” 붙들어야 합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책망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인다”고 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바울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증거했던 것 같습니다.
심리학 용어로 ‘eidetic image’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말로 번역하기 쉽지 않은 용어인데, 이렇게 정의됩니다: “현저하게 생생한, 정상적이고 주관적인 시각적 이미지로서, 실제 사건의 경험이나, 강력한 심적 자극, 집중적인 생각 등을 통해서 생길 수 있다 (a normal subjective visual image experienced with noticeable vividness that may be evoked by the experience of an actual external object, strong mental stimuli, intensive thought, etc.)” 쉽게 말해서 "마음 속에 생생하게 보이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Eidetic image는 기억처럼 우리 속에 저장되어 있는 “객관적인 정보”나 또는 꿈이나 상상이나 환상처럼 생겼다가 곧 사라지는 심상들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eidetic image는 마치 마음 속에 불을 켜 놓은 것처럼 환하게 실체로 나타나며, 사람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그것을 보면서 그 의미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느끼고, 반응한다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형성된 eidetic image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마음 속에 갖고 있는 eidetic image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 그 image가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요즘과 같은 선거철이 되면 후보들간 토론회를 자주 합니다. 중요한 사회적 이슈들에 관한 후보들의 식견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특정 이슈에 관해 어떤 후보는 현장 경험도 많고, 사람들의 의견도 많이 듣고, 연구도 많이 하고, 또 고민도 많이 해서 그의 마음 속에 관련된 eidetic image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후보는 마치 눈이 밝은 사람이 대로를 걷듯이 자유롭고, 유창하고, 힘있고, 명료하게 문제에 관한 의견들을 말하고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의 말은 듣는 사람들의 귀에 쏙쏙 들어오고, 가슴에 팍팍 꽂힙니다. 그의 말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쉽게 이해가 되며, 심지어 그 말이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져질 정도로 생생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후보는 그 이슈에 관해 아무런 관심도 지식도 없습니다. 달랑 보좌관이 급히 준비한 반쪽 짜리 메모지만 손에 쥐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의 토론은 마치 장님이 복잡한 골목길에서 방향을 잃고 벽을 더듬는 것처럼 위태롭게 보입니다. 자신도, 듣는 사람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기껏해야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데이터를 늘어놓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설사 그가 eidetic image를 가진 후보와 똑 같이 말(wording)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감동도 느낌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그의 마음 속에 있는 eidetic image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꾸며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외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는 eidetic image입니다. 그것은 내가 사는 세상이며, 내 삶을 떠받들고 있는 기초(foundation)이며, 내가 매일 인식하고, 이해하고, 만지고, 느끼며, 반응하는 나의 살아있는 현실(living reality)입니다. 그것은 내 생명의 시작이요 끝이며, 내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며 그곳에 살기 위해 필요한 전부입니다. 그리고 나는 항상 그리고 영원히 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왜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선물을 떠나서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두렵고 피곤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하고 질문합니다. 세상은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고 경쟁하며,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뒤에는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고 믿음에서 떠나게 하려는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아주 잠깐의 방심에도 쉽게 육체를 의지하고 육체를 자랑하는 세상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흔히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일하시는 두 팔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환경을 보면 수없이 많은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이 매일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알고 보면 오직 “물과 바람”입니다. 곧 바람이 불고 물이 흘러 자연 속에 온갖 조화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물이 고이고 바람이 통하지 않으면 많은 부작용들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역사하는 “물과 바람”은 물처럼 흐르는 예수님의 은혜와 바람처럼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주님의 은혜와 성령의 바람이 막힘이 없이 우리 속에 잘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듣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며 영생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축복의 시작과 끝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입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내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영원한 현실로, 내 생명의 반석으로 굳게 믿고 붙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메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생을 얻는 길 - 선하게 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누가복음 18:18-27) (0) | 2018.07.02 |
---|---|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 (예레미야 1:1-19) (0) | 2018.06.25 |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0:46-52) (0) | 2018.05.28 |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시편 90:1-17) (0) | 2018.05.14 |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4-15) (0) | 2018.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