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
예레미야 1:1-19
오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부르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이 기울어져가는 시기에 약 40년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아직 20세도 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B.C. 627년(요시야 왕 13년)에 부르심을 받아서,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그리고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시대 그리고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된 후 얼마 동안 활동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온 몸을 불살라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지만, 예레미야는 늘 협박과 조롱과 능욕을 당했으며,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들은 사람들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weeping prophet)”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말”과 관련된 단어들이 자주 나옵니다. “예레미야의 말” (1절), “여호와의 말씀” (4, 11),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6),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9), “내가 내 말을 그대로 지켜 이루려 함이니라” (12),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7),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17)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그리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부르심이 무엇을 위함이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문제는 쉽게 말해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고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끝까지” 말씀하십니다. 불행하게도 예레미야는 이 하나님의 일에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듣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선지자들이 한 일이며 또한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습니다: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미리 구별하시고 그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예레미야는 근심이 가득하여 대답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부르셨는데, 예레미야는 자신을 가리켜 “말할 줄을 알지 못하는 아이”라고 합니다. 이 둘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격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뭔가 실수를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부르신 사람들 중에는 “말할 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몇몇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셨을 때 그는 이 부르심을 거부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변명합니다: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출애굽기 4:10). 위대한 사도인 바울 또한 자신을 가리켜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rude in speech)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1:6).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말과 거리가 먼 갈릴리 시골의 “학문 없는 범인들(unschooled ordinary men)”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13). 저도 자신에 대해 “설교자가 되기에는 참 말주변이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말할 줄을 알지 못하는 아이”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부르신 것일까요?
“말할 줄을 알지 못하는 아이” 예레미야를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라는 소설입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라는 프랑스 작가가 쓴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이 그림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일인칭 화자인
“나”가 어렸을 때 장래 화가가 되기를 꿈꾸며 처음 그린
것입니다. 그는 한 책에서 동물을 통째로 삼키고 있는 보아뱀을 보고는,
정글 속에서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며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보아뱀이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것입니다. 그는 어른들(grown-ups)이 이 그림을 보고
무서워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본 어른들은 하나같이 “무섭냐고? 왜 모자가 무서워?” 하며 화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했습니다. 어른들은 화자가 그린 그림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아닌 “모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그림을 오해하는 어른들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화자는 두 번째 그림 곧 보아뱀의
뱃속에 코끼리가 들어있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자 어른들은 어린 화자에게 충고했습니다. “얘야 이런 그림들은 집어치우고 지리나 역사나 수학이나 문법을 공부하거라!”
이후 그는 보아뱀이나 정글이나 별에 관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이
좋아하는 골프나 정치나 넥타이 색깔에 관해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그를 “유식한 사람(sensible man)”이라고 칭찬하고 좋아했습니다. “어른”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아마도 이 화자가 겪은 삶이 세상에서 “말할 줄을 알지 못하는 아이”가 “말 잘하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예레미야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가 예레미야 혼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와는 달리 다른 선지자들은 모두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고 (예레미야 6:14), 또 성전 앞에 서서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7:4). 사람들은 이렇게 거짓말로 자신들을 위로해주는 가짜 선지자들을 좋아했습니다 (5:31).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듣기 원하는 것만 듣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오히려 거짓말쟁이로 모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우상 숭배의 죄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다가오는 재앙을 앉아서 그대로 당해야 했습니다. 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평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 위에는 임박한 재앙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에 삼키어졌으며, 아무도 이 진노의 심판에서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기 위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다른 인기 있는 선지자들의 “평화의 메시지”와는 달리, 그가 전할 메시지는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을”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할 말씀은 16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이라고 무시했습니다. 그가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는 사람들 가운데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입을 닫고 조용히 있으면 마음의 중심이 불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선지자로서 예레미야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며, 또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누구에게 보내실 생각일까요? 18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또 10절에는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하십니다. 예레미야가 상대할 대상은 온 세상입니다. 특히 그들 중 높은 자들, 곧 왕과 족장과 제사장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사람들을 지도하는 목자들이며, 따라서 백성들의 명운을 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어른들 중의 어른들”입니다. 그래서 “말할 줄을 알지 못하는 아이”인 예레미야에게는 그만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어린 왕자’의 주인공인 어린 왕자는 본래 화산 세 개와 장미꽃 한 송이가 있는 작은 행성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행성을 떠나서 이웃의 다른 별들을 여행하며 “어른들”을 만납니다. 첫 번째 별에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오직 명령을 내릴 줄만 알며 자신 외의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별에는 허영심 많은 신사가 있었는데 그는 오직 자신을 칭찬하는 말만 듣고 그 외의 말들은 못들은 척 했습니다 (아예 들리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 행성에는 술에 취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술을 마시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이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또 술을 마셨습니다. 네 번째 별에는 사업가가 살았는데 그는 숫자를 계산하느라 너무 바빴으며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원하는 “진리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어른들은 없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사정은 어린 왕자에 비해 훨씬 좋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과 족장들과 제사장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그를 핍박하였으며, 더욱 나쁜 것은 예레미야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거짓 예언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어른들 중의 어른들”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종 모세를 애굽왕 바로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와 유대왕 헤롯과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 서셨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보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을 “세상의 왕들”에게 보내십니다. 이는 그들이 전할 말씀이 대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합니다. 이렇게 하는 주된 목적은 세상 사람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필요와 형편을 세심하게 고려하여, 그들이 좋아할만한 설교와 프로그램들을 준비하여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세상의 소리에 더욱 민감해집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과 너무 거리가 먼 “어린 아이들의 무서운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말씀의 거룩함과 엄위함이 세상의 지식들 속에 희석되거나 아주 사라져버렸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 어른들”에게 도전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의 감독과 지도를 받는 기관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있는 그대로 전할 때, 그 교회가 “신령과 진정 (spirit and truth)”으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 교회는 그저 빈 껍데기(shell)일 뿐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어른들의 최후는 매우 비참했습니다. 유다 왕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끌려가 거기서 죽고,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 37년 동안이나 어두운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으며,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그 아들들이 눈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당하며 자신 또한 두 눈을 뽑힌 채 사슬에 매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평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말이 통하지 않는 백성들”을 위한 선지자가 되어 많은 눈물을 흘리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오늘날은 어떨까요? 말세에 일어날 일에 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것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예레미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듣지 않는 어른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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