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4:1-4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8. 7. 16. 01:25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4:1-42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 사이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 대화 중 후반부인 20-26절 말씀을 중심으로 전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왔다고 하시고, 아버지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요한복음 4장 전체는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또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 중 하나인 에베소서 말씀을 해설서로 이용하고자 합니다. 축구나 야구와 같은 경기를 볼 때, 그냥 보는 것보다 해설자의 해설을 들으면서 구경을 하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되고 따라서 더욱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복음의 완성자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해설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에베소서 3:4).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들과 말씀들은 하나 하나가 모두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신비스러운 비밀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 같은 해설자가 필요합니다. 특히 에베소서 말씀에는 오늘 우리가 공부할 요한복음 4장과 관련된 중요한 가르침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요한복음 4장을 위한 해설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선지자이심을 깨달은 여자는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이 있다 하더이다.” 여자는 예수님께 예배할 장소에 관해서, 곧 예배를 어디서 드려야 옳은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유일한 장소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Mount Gerizim)이라는 곳에서 예배를 드리며, 이곳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택하신 곳이라고 믿었습니다. 여자의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예배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1-24).

 

예배란 쉽게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하나님께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시며,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인터페이스(Interface)”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으로 정의하자면 분리되어 있거나 함께 할 수 없는 두 존재 사이에 있어서 이 둘이 서로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과 자동차가 있습니다. 사람과 자동차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전혀 다른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자동차에는 핸들과 페달이라는 인터페이스가 있어서 이것들을 통해 사람은 자동차와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속도로 달리도록 자동차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핸들과 페달을 통해서 운전자인 사람과 자동차는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동차에 핸들과 페달이라는 인터페이스가 없다면 그것이 아무리 성능 좋은 차일지라도 사람에게는 쓸모 없는 쇳덩어리이 불과할 것입니다. 또 사람이 핸들과 페달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자동차를 운전하려고 한다면 그는 실패할 것입니다. 오직 핸들과 페달을 이용해서만 자동차를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에베소서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던 사람들의 과거의 절망적인 상황을 여러가지 모양으로 표현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풍속을 좇으며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에베소서 2:2,3).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던 자라고 합니다 (2:12).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합니다 (5:8a).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소망이 없는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삶에서도 이러한 분리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는 부도덕한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아도 유별나게 자유분방한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살았습니다 (2:3). 이렇게 살아온 결과 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낮에 혼자 물을 긷는 외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가가셔서 물을 좀 달라하실 때도, 속으로는 말을 걸어주는 이 인자한 나그네가 반가웠지만, 겉으로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고 퉁명스럽게 반응하며 벽을 쌓았습니다. 그녀는 외로움 속에서 당장의 갈증을 채우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물을 길러 나와야 하는 소망 없는 어두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비참한 상황은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모든 인생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 활동들은 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분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람들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분리곧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을 열어놓으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인터페이스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창세기 28장에 기록된 바 야곱이 꿈에서 본 비전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형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챈 후, 형을 두려워하여 집을 떠났습니다. 밤이 되어 야곱은 들판에서 홀로 돌을 베고 자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보니 높은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있었습니다. 그리로 사닥다리 위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였습니다. 또 사닥다리 끝에 하나님께서 서셔서 야곱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가 누운 땅을 주실 것과, 그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번성할 것과, 또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와 그의 자손들로 인해 복을 받을 것과, 그와 늘 함께 하시며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특이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 약속을 주시면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네가 내 말을 잘 들으면……”이라든가 네가 십일조를 잘 드리면……”이라든가 하는 조건을 달지 않으셨습니다. 하다 못해 거짓말로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도망치듯 집을 떠나온 이 사기꾼에게 앞으로는 정직하게 살아라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나는 여호와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곧 오직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심으로야곱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늘 높은 곳에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야곱 사이에는 사닥다리와 그 위를 오르내리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야곱을 위해 길을 여시고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이를 본 야곱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여기 계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어떻게 발전해가는지를 보여주는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과 구약의 차이를 통해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자는 예수님께 예배할 장소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가 왔다고 하십니다. 구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율법의 준수성전의 제사였습니다. 곧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며 성전에서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과 성전을 마치 하나님 자신인 것처럼 신성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태복음 15:8).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그냥 돌로 세운 건물에 불과했으며, 율법은 종이에 먹으로 쓴 글자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처럼 성전에서 때를 따라 제사를 드리고 여러가지 규례들을 만들어 기계적으로 이를 지켰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 율법과 성전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율법과 성전을 가진 자신들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길목을 가로막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낡은 길 곧 율법과 성전을 대신할, 하나님께 나아갈 새로운 길을 여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새로운 길은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신령과 진정으로 (in spirit and in truth)”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성령님 그리고 성자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꿈에 나오는 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야곱을 연결시켜주는 인터페이스는 사닥다리와 천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닥다리는 영구하게 고정되어 있는 구조물이며, 이 구조물을 이용하여 천사들이 하나님과 야곱 사이를 바삐 오가며 야곱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꿈에서 본 이 비전과 유사한 말씀이 신약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나다나엘을 부르시면서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요한복음 1:51). 이 말씀은 야곱의 꿈과 비슷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야곱의 꿈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이용했던 통로는 사닥다리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그것이 인자로 되어 있습니다. 인자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는 사닥다리가 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천사들을 부려 이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면서 믿는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배를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라고 언급했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을 빌어 예배를 보다 정확히 정의하자면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3-6절 말씀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은 예배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예배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서도 여인은 그냥 예배할 곳에 대해 질문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예배할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더구나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여인 앞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그녀를 하나님의 딸로 인정하시며 하나님을 그녀의 아빠로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외로운 이방 여인이, 심지어 자신의 동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이 부정한 여인이 하나님의 딸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녀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에베소서 말씀에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과 연결시켜주시는 사닥다리 또는 인터페이스가 되십니다. 이 사닥다리는 믿는 자의 영혼 속에 견고하게 영구적으로 세워집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이 그 자녀의 영혼 위에 쏟아집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0). 그렇습니다. 이 여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을 유일한 조건은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곧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녀의 영혼 속에 하늘 아버지께 이르는 사닥다리가 세워지고 이를 통해 성령께서 그녀 속에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예수님께 대한 지식과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 예수님께서 성장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칡넝쿨처럼 뻗어 우리 영혼을 에워싸고 동여매어 사로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는 바입니다: “이러하므로……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3:14-19).

 

예배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고 이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길이 되신 예수님과 이 길을 통해 우리에게 한량없이 임하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은혜 속에 거할 때 그 자체로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먼저 찾으시고 이 은혜 가운데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하고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