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사도행전 1:1-11
며칠 전에 딸 마리아가 인터뷰를 해야 해서 함께 필라델피아를 다녀 왔습니다. 오가는 길에 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요즘 부쩍 더워진 날씨며, 산불이며, 갈수록 나빠지는 자연 환경에 대해 걱정을 했습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세대는 환경 문제에 관해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따라서 이런 문제들을 더 깊이 인식하고 (aware)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세대가 사회에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때가 되면 환경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들도 더 많아질 것입니다.” 딸의 생각은 이렇게 낙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별로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awareness)이 높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당장의 이익들, 특히 경제적인 이익들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플라스틱 쓰레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높지만 시장의 진열대에 놓인 대부분의 물건들이 플라스틱으로 포장되어 있고, 온실 가스의 영향을 두려워하면서도 여전히 고속도로는 운전자 한 사람만을 태운 차량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편익을 즐기는 동안 지구는 매우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있으며 조만간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미 그런 상태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회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은 이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타락한 세상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성령의 임하심”은 아마도 이 하나님의 소망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사는 우리가 이 사건의 중대함을 깨닫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하나님의 소망보다 더 급한 문제들과 소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지구의 환경은 파괴되고 있지만, 당장의 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한 병(플라스틱)의 물이 더 간절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이런 갈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3절).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관해서 여쭈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지금 이 때입니까?” (6)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은 지금 당장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부강한 새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십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의 임하심”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성경 전체 역사를 놓고 보면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에게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말씀에 따르면, 본래 성령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셨지만 그들의 타락함을 인하여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에 기록된 “성령의 떠나심”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임하심”을 비교해보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잃게 되었으며,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나라를 회복하시는지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시작 부분인 3,4장에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금지하신 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범죄한 것과 또 사람의 첫 자손인 가인이 시기심으로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타락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타락의 열매”라고 볼 수 있는 사건들도 있습니다. 창세기 6:1-3a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My Spirit)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신이 사람들과 함께 하실 수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육체(flesh)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직접적인 증거는 “육체의 아름다움”이 “미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열매”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은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벽돌을 구워 높은 탑을 쌓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창세기 11:4). 육체가 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오직 “사람의 영광”을 도모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돌보심이 없이 스스로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쳤습니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그 육체에 있지 않으며, 사람의 영광은 그 손으로 세운 것들에 있지 않으며, 그들의 능력은 그들 자신 속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아름다움과 영광과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또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거하셔서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 영광을 사람들과 함께 (share)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고 그 아름다우심을 기뻐하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며 그 아름다우심을 기뻐하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이 행복이야말로, 영적인 행복이며, 영원한 행복이며, 우리에게 참 만족과 평안을 주는 행복이며,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제 타락하여 육체가 된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 영광을 즐거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사람의 아름다움과 사람의 영광을 좇고, 이를 자랑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자랑하는 아름다움과 영광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들을 높여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이 전도된 가치관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아주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 죄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사람들은 더 열심히 육체의 아름다움을 좇고 세상의 자랑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우리를 더욱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악순환(vicious cycle)”을 불러올 뿐입니다. 거기에는 오직 칠흑 같은 어두움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이십니다.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그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 아름다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4b절 말씀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며, 또 4: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이시지만, 실상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의 아름다움과 육체의 영광을 좇아 살던 우리들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체를 따라서는 전혀 아름답거나 영광스럽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예언한 이사야서 53: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서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과연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예수님은 가난한 갈릴리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말구유에 누이셨으며,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사시며 겸손히 죄인들과 병자들을 섬기시다가,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 안에 완전히 감추어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우심이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드러났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사람의 아름다움과 육체의 영광을 좇아 사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영광이 완전히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고린도후서 4:4a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습니까?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로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하시는 일이야말로 바로 이것입니다. 곧 우리로 주님의 영광에 눈을 뜨게 하시고 그 영광을 볼 수 있는 빛을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이며, 따라서 순전히 영적인 역사입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영광에 눈을 뜰 때, 우리가 이제까지 세상에서 좇아왔던 것들에 깊이 실망하고 그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멀리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3:8). 전에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것들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전에 세상에서 아름답게 여겼던 것들을 싫어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같이 되기를 사모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행하시는 회복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영광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담은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릇을 성령께서 사용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말씀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power)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제자들이 받게 되는 권능은 어떤 권능일까요? 우리는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에 임한 “권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제자들이 각 나라 말로 방언을 했으며 (2:6절),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습니다 (2:43). 심지어 예수님께서 하시던 것처럼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일어난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5:41절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여기서 “그 이름”이란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증거한 “예수님의 이름”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구주 되심을 증거하다가 공회로 끌려가 그곳에서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창피하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시며,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며,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영혼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거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이름을 위해 받는 능욕까지도 이들에게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그들의 권능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권세자들도, 사단 마귀도 이길 수 없습니다.
제 딸 마리아는 자신이 환경 문제에 관해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따라서 이런 문제들을 더 깊이 인식하고 (aware)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마리아가 잘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염되기 전 지구의 아름다움”입니다. 마리아는 이 산천이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웠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흐르는 강에서 마실 물을 긷고, 시냇물에 빨래를 하던 시절을 알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과거에 마실 물을 돈을 주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생각이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대가 바뀔수록 오염되기 전 이 지구가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웠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점점 더 줄어들 것입니다. 이 땅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질 것이며, 결국 우리가 무엇을 회복해야 할 것인지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타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어 이제 무엇을 회복해야 할 것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위해 “참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그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회복하시기 위해 우리를 이 예수님의 증인으로 세우시고 보내십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눈을 뜨기를 기도합니다. “오직” 이 주님을 기뻐함으로 권능이 충만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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