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물 – 구원의 소망
로마서 5:1-11
우리는 지난 설교에서 “하나님의 선물 – 의롭다 하심”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로마서 5:1-11절에 설명되는 하나님의 은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이미 설명한 바 “의롭다 하심”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소망”입니다. “의롭다 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집에 들어가며 또 그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신분증”과 같은 것입니다. 이 표식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히브리서 9:11,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의 피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온전하고 완전한 제사입니다. 우리가 이 피를 믿고 붙들 때, 주님의 피는 우리의 허다한 죄를 덮고 더 나아가 우리의 죽은 양심을 살리고 깨끗하게 합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즐거이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의롭다 하심”의 은혜는 모든 다른 은혜의 시작이며 영원한 기초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또 믿는 자들이 갖게 되는 구원의 소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구원을 “장차 일어날 일”로 언급합니다. 예를 들어 2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고 하고, 9절과 10절에서도 각각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며 구원을 미래에 일어날 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본다면 신자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기보다는 “구원을 받는 과정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장차 있을 구원”을 소망으로 갖고 사는 것입니다. 소망은 크리스천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말이지만, 믿는 자가 아니더라도 소망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다 어떤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소망”이란 그 사람의 미래입니다. 소망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말입니다.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없다면 불행할 것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사람들은 땀 흘려 일하고, 저축도 하고, 보험도 들고 합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소망은 그 사람의 존재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어쩌면 “전부”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사실입니다. 신자란 “소망을 가진 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소망 밖에 없는 사람,” “오직 소망으로 사는 자,” “온 마음으로 기다리는 자” 등으로 표현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미래의 소망이 너무 크고 영광스러워서 현재의 것들이 초라하게 보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호화로운 삶이라도, 비유하자면, 하늘 궁궐에서 펼쳐지는바 산해진미가 가득하고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영원한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 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추위에 떨면서 나무 젓가락으로 컵라면을 먹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이마저도 이 영광의 소망 때문에 즐겁고 기쁘기가 그지없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갖고 있는 “구원의 소망”은 세상의 소망과는 여러가지 점에서 매우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갖는 소망은 “보이는 소망”이며, “나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야 하는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들은 육체의 소망이며, 썩어질 소망입니다. 이루어질 것인지가 매우 불확실한 소망이며, 심지어 이루어졌다고 해도 실망스러운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표현을 빌자면, 세상 소망은 “부끄럽게 하는” 소망입니다. 세상 소망은 한 마디로 말해서 “거짓 소망”이며 “죽은 소망”입니다. 그러면 믿는 자가 갖고 있는 구원의 소망은 어떤 소망일까요? 구원의 소망은 “참 소망 (true hope)”이며 “산 소망 (living hope)”입니다. 어떤 점에서 구원의 소망은 “참 소망”이며 “산 소망”이 됩니까? 이는 무엇보다도 이것이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우리 또한 장차 영생으로 부활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때 죽음은 생명에 삼켜지고 다시는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 밖에서 인간은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밖에서 모든 인간은 마치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무슨 소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죽음과 소망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오직 절망과 두려움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 소망 곧 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산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소망”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구원은 마치 “비밀하게 싸여진 선물”처럼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이 소망에 대해 로마서 8: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이렇게 구원은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소망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활의 믿음”으로 이 소망을 보고 또 바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만이 이 소망을 보고 바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원을 다른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2절). 그리고 이 영광에 대해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8:18). 이 말씀들은 “구원의 소망”이 우리가 성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이루실 것임을 증거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이 걸려있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자주 구원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그가 누워있는 무덤 앞에 서셔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과 마르다가 무덤에 왔을 때는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4일이나 지나서 시체 썩는 냄새가 무덤 밖으로까지 진동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마르다 생각에,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예수님도 하나님도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오히려 이 절망적인 상황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밝히 드러날 매우 소망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마르다가 믿고 무덤을 막은 돌문을 옮겼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나사로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도울 때 저는 자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사람들의 곤란한 사정들을 들어보면 마치 “죽어 무덤에 묻힌 지 4일이 지나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너무 절망적이어서 위로조차 하기 민망스럽습니다. 더구나 “가난하고 힘없는 전도사”에 불과해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자신을 생각하면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 민망스럽지도, 서글프지도 않습니다. 갑자기 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억제할 수 없는 흥분이 속에서 끓어오릅니다. 정말 이 절망적인 상황이야말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절호의 기회임을 확신하고 그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영광을 드러내시는지 보세요!” 그러면 “절망”이 오히려 “소망”이 됩니다. 제 딸 마리아가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인데, 어느 날 딸이 방에서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 “너 왜 우냐?”하고 물으니 자기가 가고 싶은 대학에 못 가면 어쩌나 해서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저의 수입은 겨우 한 달 생활비가 빠듯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설사 마리아가 좋은 대학에 합격한다고 하더라도 학비를 대줄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저도 우는 마리아 옆에 앉아서 같이 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리아 옆에 앉아 같이 울지 않았습니다. 대신 딸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마리아야, 하나님께서는 이미 너를 위해 가장 좋은 대학을 준비해 놓으셨단다! 네가 이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마리아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좋은 대학과 꿈보다 더 꿈같이 행복한 대학 생활을 마리아에게 주셨습니다. 딸은 지금도 이것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가진 구원의 소망은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과 긴밀하게 얽혀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소망이 하나님의 영광과 얽혀 있음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원하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크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물론 그 반대 경우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립보서 1:20,21). 바울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은 살든지 죽든지 괜찮다고 합니다. 예수님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원”을 포기하시고 그 뜻에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 또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고 시작합니다. 우리가 가진 “구원의 소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유일한 소망으로 가진 사람은 이미 이 소망 안에서 그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를 결코 죽음에 버려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한 영광이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이 의심받거나 무시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구원 곧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2절). 곧 이 소망에 온 마음을 빼앗겨 흥분과 감격 가운데 그것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의 소망으로 인해 다른 것들은 눈에도 마음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세상의 소망”에 속아서 “구원의 소망”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기보다 “하나님이 오늘 오시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세상에서 환난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소망을 갖도록 도우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소망을 더욱 순수하고 간절하게 만드십니다. 3,4절 말씀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신자들이 겪는 환난은 금이나 은을 연단하는 용광로와 같습니다. 잠언 17:3절은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하며, 또 이사야서 48:10절에서 하나님은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하십니다. 신자의 세상에서의 삶은 “고난의 풀무에 마음을 연단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우리 마음에 남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순전한 믿음과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날로 새로워지는 우리 속사람을 보면서 마냥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갖고 있는 구원의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단 한 점의 나쁜 것도, 해로운 것도, 약한 것도, 모자란 것도, 슬픈 것도, 아픈 것도, 무서운 것도, 싫은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영광스럽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님의 언약과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보증된 확실한 소망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이 소망 때문입니다. 우리 매일의 삶이 오직 이 소망으로 인도함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한 마음으로 이 구원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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