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하나님의 의 (로마서 3:19-3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9. 1. 22. 03:18

하나님의 의

 

로마서 3:19-31

 

브라질의 아마존 강 상Meeting of two waters.jpg류 쪽에 두 개의 강물이 만나 합쳐지는 구간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만난 두 물줄기는 약 6km (3.7마일) 정도를 서로 섞이지 않고 흐르는데 이는 물의 밀도, 속도, 온도 등이 서로 달라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강이지만 그 안에 두 개의 서로 다른 흐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하나의 거대한 강이라고 본다면 이 안에도 두 가지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 내내 함께 흐르는 두 개의 물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사람의 죄입니다. 이 두 흐름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그리고 우리 각자의 경험을 통해 보게 되는 바 세상의 역사와 개인의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사람의 죄는 서로 섞일 수 없습니다. 하나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며, 다른 하나는 진홍같이 붉은 (이사야 1:18) 색을 띠고 있습니다. 이 두 서로 다른 흐름 사이에는 늘 숨막히는 긴장이 있고, 많은 다툼과 분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떨어지지 않고 하나의 강으로서 내내 함께 달립니다. “하나님의 의사람의 죄가 이렇게 함께 흐르는 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죄를 삼켜버리고 이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흔적도 없이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righteousness 또는 justice)”입니다. “의로우심,” “의롭다 하심과 같이 와 관련된 말들도 자주 나옵니다. “라는 말이 어려운 신학 용어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매일 먹는 과 같이 같습니다. 우리 몸은 매일 밥을 먹어야 합니다. 밥을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하고, 병균과 싸우는 면역력이 생기고, 일을 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는 우리 영혼의 입니다. 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6). 이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의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표현하십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고 실제입니다.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올바름를 구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받은 것이 있으면 무엇인가를 주어서 되갚아야 마음이 편합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사과하고 용서를 받아야 마음이 편합니다. 착한 일을 하면 마음이 뿌듯하고 행복합니다. 게다가 사람들로부터 칭찬까지 듣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배부르고 만족할 것입니다. 반대로 억울한 모함을 당하는 것은 칼로 찌르는 것보다 더 아픕니다. 나에 관해 나쁜 말을 퍼뜨린 사람과 평생 원수로 지내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매우 불행한 소식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죄와 죄인 됨에 대해 사도 바울이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하여 증거하는 바는 참으로 참혹하고 절망적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로마서 3:10-18). 이 말씀은 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어떤 사형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는 내가 매일 먹고 마셔야 할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한 톨의 쌀한 방울의 물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더러운 물과, 먹어도 전혀 배부르지 않는 쭉정이뿐입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매우 생경한 것이며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곧 법을 완벽하게 잘 지켜서 하나님께로부터 옳다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19,20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모세의 십계명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 그런데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정죄합니다. 마치 법률에 따라서 범법자를 법정에 세우듯이,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하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만큼이나 엄격합니다.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욕심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것이 이 되며 가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탐심 자체가 심각한 죄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 이미 간음한 것이며 (마태복음 5:28), 형제를 보고 화를 내는 것이 살인죄와 같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5:21).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는 우리는 말로 내뱉은 것뿐 아니라 마음에 품은 생각까지도 책임을 져야 한다(You are not only responsible for what you say, but also for what you do not say)”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밖으로 내뱉은 말보다는 마음에 품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인정하다시피 우리의 마음은 심하게 부패해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한탄합니다 (예레미야 17:9). 그리고 이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으로부터 온갖 더러운 것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11).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나무 잎을 엮어 몸을 가리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3:7).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죄 아래 가두신 것은 우리의 수치를 드러내어 정죄하고 괴롭히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의 수치를 가리시고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이를 깨닫고 이 하나님께 나아와 그 은혜를 구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죄악됨은 우리의 모든 자격을 벗겨버립니다. 곧 우리가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다시 말해서 죄인을 용서하시는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 말씀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God’s justice)”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베푸신 은혜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오래 참으시고,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의 희생으로 그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의로움일까요? 이게 정의 (justice)”일까요? 우리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의란 죄에 대한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오래 참으시고 결국은 그 죄를 간과하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의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정의에는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허물을 죄 없는 자신의 아들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부당함의 극치입니다.

 

자신의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righteousness)에 이르고자 하는 이들은 사람들의 죄를 오래 참으시고 결국 그 죄를 자신의 아들에게 돌리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를 못할 뿐 아니라 아예 이런 생각 자체를 미워하고 이를 이라고 부르며 핍박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시면서 치열하게 싸웠던 무리들은 사실 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의인들이었습니다. 이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먼 나라로 가서 창기와 함께 탕진한 후 거지가 되어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측은히 여겨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열고 아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깁니다. 그런데 이를 본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따집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첫째 아들은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충만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그 명을 어김이 없는착한 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로운자신에 비하면,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동생은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첫째 아들의 눈에는, 그런 죄인을 용서하시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이전보다 더 많이 그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까지도 불의하게 보였습니다. 이런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찾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버지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며, 필요한 일이며,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이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죄인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이 의로움은 자칭 의로운 자들에게는 불의함으로 보이며 따라서 그들이 싫어하고 핍박하는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죄인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오직 죄인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고 찬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죄인만이 그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죄로부터 자유롭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참으로 기묘한 딜레마 가운데 있습니다. “죄인이 되어야 의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써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서 오직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먹고 마시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의 패키지로 담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우리의 흉악한 죄를 드러냄과 동시에 이를 용서하시고, 치료하시고, 의의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15). 사도 바울은 이 딜레마를 즐겁게 노래했습니다. 이는 죄인 중에 괴수인 그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너무 크고 넓고 높고 깊어서 강물처럼 흐르는 그의 시뻘건 죄를 다 삼켜버리고 그 흔적조차 없애버립니다. 그의 안에 이 사랑의 예수님께서 늘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살며 주님의 은혜를 세상에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그냥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의인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몸 속에 피가 끊임없이 흘러 몸 속에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며 또 몸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모아 배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의로운 피가 내 속에 살아서 끊임없이 흘러 우리 영혼의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하며, 대신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1초라도 중단된다면 우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며 이전보다 훨씬 더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예수님께 있습니다. 오직 주님의 피가 매일 우리를 깨끗하게 하심으로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사는 참된 크리스천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