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사람들
열왕기상 17:7-24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살아있는 사람들”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옆에 있는 그림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옆의 그림은
보시다시피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차게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기는커녕 오히려
그 물을 타고 올라가는 이 물고기는 “살아있음”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에게 실감나게 드러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사납게 흐르는 물을 거스르면서 우리에게 “생명의 힘”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런 삶에 초대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 세상은 “항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넘쳐흐르는 죄 특히 우상숭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여러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노아 시대에는 전세계적인 홍수로 나타났으며, 오늘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여러 해 계속되는 가뭄과 기근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질병으로, 때로는 전쟁으로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 휩쓸어버리기도 합니다. 꼭 이런 재난이 아니더라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때가 되면 쇠하고, 죽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심지어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과 땅마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옷처럼 낡아지고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시편 102:26, 마태복음 24:35). 이런 현상은 오늘날 전쟁, 기근, 환경 오염, 기후 변화와 이에 따른 자연 재해 등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는 더욱 심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바울은 이 말씀을 장차 올 미래의 일로 말했지만, 오늘날 이것은 미래가 아니고 현재의 일입니다. 극에 도달한 사람들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가 홍수처럼 세상을 휩쓸고 있으며, 사람들은 마치 죽은 물고기처럼 이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선지자 엘리야의 시대 또한 이런 영적 현실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한 토막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우상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사당을 지어 바알을 숭배하며 아세라 상을 만들었습니다. 열왕기 16:33절에 따르면 아합 왕은 그의 우상숭배로 이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더 심하게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아합 왕에게 보내시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땅에 여러 해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의지하여 농사를 짓는 ‘천수답’이 대부분인 이스라엘에서 여러 해 동안 가뭄이 계속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재난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기시고 그곳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내의 물마저 말라버렸습니다. 가뭄의 고통이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 사르밧이라는 동네에 사는 한 과부에게로 보내셔서 그녀로부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섬김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의 형편은 엘리야에게 음식을 대접할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갖고 있는 것은 겨우 한 움큼의 밀가루와 병에 조금 남아있는 기름이 전부였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땅에 임한 가뭄이 이곳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시돈은
오늘날 레바논이 위치한 곳으로서 이웃 도시인 두로와 함께 바다를 끼고 상공업이 발달한 고장이었습니다. 시돈
사람들은 그들의 식량을 주로 이스라엘에 의존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도행전 12:20절 말씀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어쨌든 이 과부가 가진 것은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위해 한 끼를 마련하기에도 부족했습니다. 아마도 이제 식량을 더 이상 구할 길마저도 모두 막혀버렸는지, 그녀는
이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 아들과 나누어 먹고 죽을 작정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 식사를
대접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가 가진 것을 털어서 이 과부를 도와주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무슨 착각을
하셨는지 하나님께서는 이런 과부에게 공궤를 받으라고 엘리야를 그녀에게 보내셨습니다.
이런 그녀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야는 나무를 줍고 있는 사르밧 과부를 만나 그녀에게 마실 물을 조금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물을 가지러 가는 그녀에게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청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과부는 자신의 사정을 솔직하게 있는 대로 털어놓았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여자의 말을 들은 엘리야는 “아 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하면서 사과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엘리야의 이 말은 참으로 부당하게 들립니다. 엘리야는 과부와 그 아들이 먹기에도 모자란 마지막 남은 음식을 나누어달라는 것도 모자라서, 그것도 “먼저”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말을 다 들어보면 결코 부당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과부에게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뭄이 계속되는 동안 그녀에게 가루와 기름을 끊이지 않고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이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과연 엘리야의 말대로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써도 써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녀의 집에 임한 것입니다.
비록 이 과부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과부를 미리 아시고 그녀를 위해 이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이루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르밧은 시돈에 속한 마을인데 시돈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물들인 이세벨의 출신지입니다. 이런 이방 땅 사르밧의 한 가난한 과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은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이런 은혜를 입은 것일까요? 이는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며, 그 말씀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심으로” 맹세했습니다. 이 과부의 마음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 가뭄의 재앙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또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존대했습니다. 사람이 큰 어려움을 만나면 깊은 두려움에 빠지고 몸과 마음이 마비가 됩니다. 마치 홍수에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와 같이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만일 이 과부가 이런 상태였다면, 떡을 나눠달라는 엘리야의 말에 격분하여 그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거지를 내어쫓듯이 쫓아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엘리야에게 떡을 나눠줄 수 없는 자신의 형편을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이를 믿었으며 매우 어려운 일 곧 “떡을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오기”를 기쁘게 순종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일은 참으로 형용할 수 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바로 눈 앞에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목이 빠지도록 먹을 것을 기다리고 있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런 아들을 뒤로 한 채 생명 같은 떡 조각을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이것은 연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살을 거스르며 헤엄쳐 올라가는 것보다 수백 배 아니 수천 배 더 힘든 일입니다. 저 같으면 그냥 배고픈 제 자식에게 떡을 먹이고 죽는 것이 훨씬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해낸 것입니다. 이는 그녀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손에 쥐고 있는 한 줌의 밀가루 대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이 과부에게 또 다른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녀의 외아들이 병이 들었는데, 그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결국 죽은 것입니다. 이에 여자는 엘리야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엘리야는 여자에게서 아들의 시신을 받아 자기 침상에 누이고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심으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아들을 받은 과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앞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여자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절망스러운 문제를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죽음도 능히 굴복시키는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부르는 극심한 기근을 직면하여, 여자는 식량을 끊이지 않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과부가 엘리야에게 한 말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자는 아들이 병들어 죽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아들을 죽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들이 죽은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말은 언뜻 생각하면 하나님께 대한 원망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여인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저는 죄인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제게 이러한 재앙을 내리심은 마땅합니다. 하지만 제발 저를 불쌍히 여기사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 아들을 살려주시길 빕니다.” 과부는 어쩌다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만나게 되고 또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죄인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심판의 주가 되십니다. 죄인과 하나님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죽음의 형벌”은 그녀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가 온 땅을 뒤덮고, 3년 기근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말려버리듯이, “죄와 죽음”은 모든 생명들을 예외 없이 휩쓸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보고 “다 내 팔자여!” 하며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근에서 구원하였으니, 이제 더 큰 은혜를 베푸셔서 죽음에서도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자신과 아들을 통째로 내맡겼습니다. 자신의 죄와 아들의 죽음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절망 가운데 힘없이 죽음의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고, 그 은혜를 받고자 온몸을 비틀어가며 거친 물살을 타고 솟아올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손을 뻗어 그녀와 그 아들을 건지셨습니다.
베드로전서 3:20b절에 노아의 홍수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노아 시대에 큰 홍수가 나서 코로 숨쉬는 모든 것들이 물에 빠져 죽었을 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미리 준비한 방주에 들어가서 이 재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전서 말씀은 이들이 “물로 말미암아 (through water 또는 by means of water) 구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창세기 6:8)에게는 이 홍수가 오히려 구원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같은 물이 누구에게는 죽음의 형벌을, 누구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에 대해서도 진리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2:4). 그리고 이 산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2:6). 그런데 같은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십니다 (2:8). 같은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로운 구원의 산 돌이 되시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을 넘어뜨리는 거치는 돌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겪은 극심한 기근과 아들의 죽음은 그 자체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통해 긍휼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기근과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계곡을 세차게 흘러내리는 물은 그 길목에 놓여있는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휩쓸고 내려갑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연어에게 이 물은 오히려 그가 가고 싶어하는 저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살아있는 연어에게 이 물은 구원의 길이 됩니다.
우리는 이 연어처럼, 그리고 이 과부처럼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 우상숭배의 시대에, 사람들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가 홍수처럼 세상을 휩쓸고 있는 이 시대에,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자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비록 내 죄를 생각나게 하는 수없이 많은 슬픈 일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지라도 이에 떠내려가지 않고 믿음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더 높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믿음으로 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살아있는 사람”으로 새해를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메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의 (로마서 3:19-31) (0) | 2019.01.22 |
---|---|
일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9:1-41) (0) | 2019.01.07 |
임마누엘 (이사야 7:1-25) (0) | 2018.12.24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리니 (이사야 11:1-10) (0) | 2018.12.10 |
우리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 (0) | 2018.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