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9:1-41
한 블로그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환경은 사람을 지배한다. 그러나 가끔 그 환경을 이겨내는 사람이 있다.” Hidden Figures라는 영화를 소개하는 글인데, 이 영화에서는 NASA에 근무하는 세 명의 흑인 여성 연구원들이 차별과 편견을 이겨내고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별한” 소수를 제외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환경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말이 더 마음에 와 닿으며 진리에 가깝게 들립니다. 그리고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한 사람의 운명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환경에 의해 이미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 상담 치료 프로그램으로 “내적 치유”라는 것이 있는데, 이 분야의 한 전문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개인의 성격 형성은 조상으로부터 흐르는 피의 흐름에서, 태아 때 어머니의 영향에 의해, 그리고 자라면서 외부로부터 받는 영향에 의해 이루어진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두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격”이란 바로 “나 자신”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나의 성격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이미 대부분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내 성격에 문제가 있을 경우, 그것을 조상 탓이나 부모 탓으로, 또는 환경 탓으로 돌린다면 마음은 좀 편할지 모르겠으나 “환경을 이겨내는” 또는 “운명을 이겨내는” 삶을 살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전혀 다릅니다.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또 사람이 환경을 이겨내는 것도 아닙니다. 굳이 “환경”이라는 말을 쓰자면, 사람에게는 오직 두 가지 “환경”이 있습니다. 하나는 빛이고, 다른 하나는 어둠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빛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며, 어둠은 예수님 밖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삶으로 빛의 열매를 맺거나, 혹은 어둠 가운데 삶으로 어둠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환경들, 곧 앞에서 언급한 조상이나, 부모나, 차별이나, 편견 등은 중요한 것들도, 불평할 것들도, 붙들고 씨름해야 할 것들도, 극복해야 할 것들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안에 거하며, 그 빛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또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싸우고, 인내하며,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회개하고 우리 마음을 열어 예수님의 빛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 1초 만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우리는 곧 어둠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베드로는 믿는 자들에 경험하는 바 이 두 가지 환경 곧 빛과 어두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입니다. 그는 길 가에 앉아서 구걸을 해 연명하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8절).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태어난 그를 보고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죄에 대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놓고 그에게 “너는 죄 가운데 났다”고 말했습니다 (34). 이 사람의 삶은 정말 “불행”의 모든 요소들을 다 갖춘 것 같습니다. 몸에 흐르고 있는 조상들의 더러운 피, 치료의 소망이 전혀 없는 앞을 볼 수 없는 눈, 매일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해야 하는 가난함,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 하나님의 부당한 형벌, 억울함과 온갖 상처들로 응어리진 마음 등 그의 삶은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마치 무거운 바위 틈에 끼여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작은 벌레와 같았습니다. 아무런 표정도,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렇게 죽은 자처럼 쪼그라져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이 소경 거지를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제자들은 이 소경 거지에게서 “절망”을 보았습니다. 제자들 보기에 그의 불행은 운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궁금한 것은 “그의 불행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 탓이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은 다른 많은 예민한 질문들과 우울한 논쟁들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고 답을 얻지도 못하고 이 불쌍한 사람을 뒤로 한 채, 다만 그의 불행이 나와 내 가족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자리를 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매우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소망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에 눈에 이 소경 거지는 이미 “절망” 자체였습니다.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좋은 일이라고는 겨우 인심 좋은 사람을 만나 동전 몇 개를 더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불쌍한 거지의 소경 됨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란 어떤 일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바 6일 동안 세상을 창조(creation)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일하심으로 지으신 것들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4, 10, 12, 18, 21, 25, 31).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좋은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소경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형편이 이미 너무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불쌍한 소경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에게 선한 일을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자기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4절 말씀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의 관심을 이 소경의 불행한 삶으로부터 “일” 곧 “하나님의 일”로 옮기십니다. 이 일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 곧 “하나님 아버지의 일”입니다. 이 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일까요? 이 일이란 “구원의 일” 또는 “재창조(re-creation)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으며, 또한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경 거지는 이 일의 대상(object)이며 재료(material)인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도 일을 합니다. 농부는 땅을 일구고, 또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가정에서 사람들은 매일 많은 일들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어떻게 다릅니까?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일은 열매가 있으며 (fruitful), 반면에 사람의 일은 열매가 없다는 (empty) 것입니다. 사람의 일에 관해서 창세기 3:19절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범죄함으로 타락한 사람은 일생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고생하다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열매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열매가 있습니다. 그 열매는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안에 참 생명 곧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이를 소경의 눈에 바르신 후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소경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서 실로암 못의 물로 눈을 씻자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의 일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나님께 나를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으로 내려가 눈을 씻었습니다. 이 순종은 소경이 하나님께
드린 바 작은 “믿음의 증표”입니다. 그의 과거의 삶은 항상 무거운 바위에 짓눌린 어둠과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어루만지시고 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말씀하실
때 그는 난생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습니다. 어둠과 절망의 바위가 쪼개지고, 그 틈새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영혼 속에 마치 빛난 보석처럼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로암 연못은 암반을 뚫고
깊게 파 내려간 못(pool)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은
이 좁은 돌계단을 더듬어 내려가면서 사람들과 부딪히고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직 그의 영혼 속에 빛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어둠 속을 헤쳐나갔습니다. 말씀대로 물로 그의
눈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5절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소경이 이 빛을 받아들였을 때 그에게 “즉시” 구원이 임했습니다. 칠흑 같던 그의 인생이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이는 그가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8절은 믿는 자들을 가리켜 “빛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 말씀은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두 가지 환경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어두움과 빛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주님 곧 예수님입니다. 이 빛을 믿지 않고 거부할 때, 그 사람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는 깊은 어둠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둠은 오직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만이 “참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 빛”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5:20절 말씀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오늘 말씀에서도 이와 같은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적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고쳤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자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선을 악하다고 하며, 빛을 어둠이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 또한 빛의 삶을 살며, 빛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며 (에베소서 5:9),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어떤 어두움 가운데 있었는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빛은 모든 어두움을 이기시며, 우리로 하나님의 일을 경험하게 하시며, 그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매일 즉시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빛 속으로 들어가며, 빛 가운데 행하며, 그 빛으로 어두움을 이기고 빛의 열매를 맺는 빛의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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