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빛이시라
요한1서 1:1-10
불신자들에 비해서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누리는 특권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참으로 많고 영광스럽고 값진 것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믿는 자들은 죄를 용서받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를 얻으며, 의미 없고 절망적이었던 삶이 천국의 소망을 가진 기쁘고 힘이 넘치는 삶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일어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 말씀에는 “사귐”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3,6,7절). 이 사귐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교제”나 “함께 나눔” 등으로도 번역되며, 영어 성경에는 주로 “fellowship”으로, 그리고 원어 성경에는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단어로 쓰여져 있는데 아마도 성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용어일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사귐이나 교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나누는 사귐은 세상에서의 사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귐이야말로 우리를 거룩함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참된 사귐”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짓이 없는 사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빛이 되시는 하나님과 죄인 된 사람이 “참된 사귐”을 갖는데 있어서 생기는 어려움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제자들은 그들의 더럽고 냄새 나는 발을 예수님 앞에 내밀고 주님의 씻기시는 손에 맡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차마 이를 할 수가 없어서 예수님의 섬기심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주여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늘 자신을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자부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베드로에게는 그의 발보다 훨씬 더 추하고 냄새 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숨겨진 욕심”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하며 자신 있게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장담과는 달리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자신의 목숨을 더 사랑했으며, 그래서 위험에 처한 예수님을 모른다며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2:61절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돌이켜 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베드로의 “숨겨진 죄”가 예수님의 빛 가운데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전날 자신의 더러운 발을 예수님 앞에 내밀 때보다 훨씬 더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죄”로 인해 당황하시거나 서운해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의 마음 속을 “훤히” 다 알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베드로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순간 베드로 자신도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때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참된 사귐” 곧 “거짓이 없는 사귐”이 시작된 것입니다.
빛이 되시는 하나님과 죄인 된 사람이 “참된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비슷한 것들끼리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사귐에서 이런 사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외모이든, 재산이든, 직업이든, 학력이든 자신의 “가치”를 올리고, 또 그 높은 가치에 걸맞은 상대를 찾습니다. 물론 이런 경쟁의 와중에 “더럽고 냄새 나는 발을 감추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며,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자원들을 쏟아 붓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최소한 손해가 나지 않는 “사귐”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이런 “사귐”은 사실 사귐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누는 사귐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적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4:32-3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이 말씀들 중 “통용하다 (함께 쓰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의 원어가 “코이노스(Koinos)”로서 앞에 설명한 “사귐” 곧 “코이노니아(Koinonia)”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귐”의 근본적인 의미는 “가장 귀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환영할만한 일이겠지만, 부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썩 내키지 않을 일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물질만능의 세상에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이 사람들은 모든 물건들을 함께 사용했으며, 그 중 어느 누구도 자기 소유의 소중한 재물을 제 것이라고 챙기거나 숨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사귐”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귐”의 근본적인 의미를 정의하자면 “가장 귀한 것을 남김 없이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귐에서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소중한 재물”을 통용함으로써 사귐을 가졌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귐을 매개하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신 것입니다. 부자들이 자신들의 재물을 아끼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용했을 때 믿는 자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없어졌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다 채워주심으로 우리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전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난 “사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1,2절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것과 또 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것을 말씀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통해서 빛 되신 하나님과 참된 사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죄인 된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과 참된 사귐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심지어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지만 이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빛 가운데 나아오도록 도우십니다. 베드로의 발을 씻으시고, 그의 숨겨진 죄를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는 이유는 그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씻으시기 위해서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예수님 앞에 우리 죄를 고백하면 우리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이 예수님의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아 완전히 해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크리스천들 중에도), 죄가 없다고 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어둠 가운데 거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거부합니다. 죄인 됨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이는 우리의 본성이 악한 것을 사랑하며 심지어 이것을 선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하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독차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길을 막으며 말렸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되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결국 모든 일은 베드로의 욕심대로 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베드로의 죄가 빛 가운데 드러나고, 그에게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자백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자백한다”는 말이 로마서 10:9절의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이라는 말씀에서 “시인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 두 말은 모두 같은 단어(Homologio)로 표현되는데,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같은 말을 하다,” “OO의 말에 동의하다,” 또는 “말씀에 동의한다(I agree with the Word)”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시골 어부 출신으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사랑하는 주님을 배반하고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는 “죄”가 숨어있음은 아마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감으로 이런 자신의 숨은 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죄를 드러내시고,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아멘(Amen)”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본래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 (I-don’t-agree-with-the-Word)”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고난을 받으러 가시는 예수님의 길을 막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며 사정했습니다. 그의 더러운 발을 씻어줄 테니 내놓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내 발은 절대로 씻을 수 없나이다” 하며 거부하였습니다.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며 반박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말씀”을 끝까지 경험한 베드로는 결국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의 주 되심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증거된 예수님 곧 “생명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아멘” 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자신이 지은 잘못들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가장 귀한 것,” “나의 우상,” “나의 숨겨진 욕심”을 예수님의 빛 가운데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나의 가장 귀한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 안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가장 귀한 것을 남김 없이 함께 나누는” 참된 사귐을 하나님과 나눌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사귐이란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참된 사귐을 가지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귐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사귐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나의 가장 귀한 것, 곧 나의 우상 다시 말해서 나의 죄를 예수님 앞에 드러내고 자백하며, 이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예수님을 그 마음 중심에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에 대한 감사로 나와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주님과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이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에 초대되었습니다. 우리 영혼이 오직 하나님의 빛으로 충만하여, 아무 것도 감춘 것이 없이 매일 주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주님의 거룩하심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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