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이사야 7:1-25
오늘 말씀은 선지자 이사야가 전하는 예수님 탄생의 예언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이 땅에 태어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 약속의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을 잘 공부하면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우리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때는 아하스가 남유다의 왕으로 있던 시대입니다. 아하스는 남유다 왕국의 12대 왕으로서 약 16년간 (732-716 BC) 그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열왕기하 16:2-4절은 아하스 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16년을 치리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이런 아하스 왕이 유다를 다스리고 있을 때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유다 왕국의 북쪽에 위치한 북이스라엘 왕국과 아람 왕국이 서로 동맹을 맺고 함께 유다 왕국을 치러 온 것입니다. 유다를 치기 위해서 아람이 이스라엘과 힘을 합쳤다는 소식이 들리자 유다 왕 아하스와 그 백성들의 마음이 마치
숲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한국식 표현을 빌자면 아마도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 왕에게 보내셔서 그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스라엘
왕 베가)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아람이 불에 타고 남은 연기 나는 나무막대기에 불과하며, 또 그들이 힘을 합할지라도 그 꾀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그들의 나라가 곧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전하는 이 기쁜 소식을 들을 왕 아하스는
그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임을 보여줄 징조를 아하스가 원하는 대로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하지만 아하스는 이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함을 보여주는 징조 구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고 말하는 아하스 왕이 겸손하고 경건해 보입니다. 하지만 아하스의 대답을 들은 이사야는 그를 심하게 책망합니다. 그가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을 괴롭게 한다고 합니다. 아하스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게 한 것일까요?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하스 왕의 문제에 대해서 9b에 이사야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아하스가 징조 구하기를 거절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절대적으로 믿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반대였습니다. 그는 “연기 나는 부지깽이”같은 아람과 이스라엘을 여전히 두려워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부강함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 강한 앗수르 제국에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열왕기하 16:7,7절 말씀에 따르면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많은 예물과 함께 사자를 보내어 간청했습니다.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아하스가 앗수르 왕을 대하는 태도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떠는 그를 위해 그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주시고, 구원을 말씀을 주시고, 심지어 그를 위해 원하는 대로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시고, 겸손히 그를 도와주시고, 믿음이 없는 그를 위해서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까지 하십니다. 이렇게까지 낮아져 그를 섬기시는데도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 도우심을 거절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만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교만과 불신으로 목을 꼿꼿이 세우던 아하스가 앗수르 왕에 대해서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고 하며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에게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하스 왕의 교만과 불신은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징조를 약속하셨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말씀은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예수님께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아들로 태어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선지자는 이 아기의 이름으로 ‘임마누엘’이라고 하는데, 이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된 이 징조(sign)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한 징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으로 확실히 보여주시고 또 이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변할 수 없는 언약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을 통해 아기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또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징조를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며, 수없이 많은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시고 태어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수 많은 징조들의 클라이맥스이며, 모든 징조들의 모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특히 “믿음”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 왕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징조는 우리의 믿음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징조”를 굳이 정의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믿는 자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천사가 갈릴리 나사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었지만 아직 동거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아기를 가질 수도 없었으며, 따라서 절대 아기를 가져서는 안될 상황이었습니다. 천사는 그런 그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되물었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러자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에 마리아가 말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과연 천사의 말대로, 그리고 마리아의 믿음대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이 잉태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믿는 자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아기가 잉태되듯이 비밀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오직 말씀을 받고 믿은 자만이 그 일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가 아기를 잉태하고 낳는 것은 매우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징조”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 “징조”를 통해서 자신에게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이 복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그녀에게 임한 것입니다.
“징조”란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 안에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더 큰 역사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소식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그 아들이 누구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낳을 아들은 어떤 분이십니까? 천사는 이 아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는 아마도 자신이 아기를 잉태한 것이 성령으로 된 것이며, 또 그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증명할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아들 예수께서 얼른 자라나시기를, 그래서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기를 믿고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친히 드러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징조는 “스스로 증명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땅에 뿌려진 씨앗이 스스로 크는 것과 같습니다 (마가복음 4:27). 우리가 할 일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마음에 품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은혜를 입은 여자가 된 것은 단지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계시는 동안,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천사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징조는 오직 믿고 구하는 자에게만 나타나며 또 오직 믿는 자만이 그 징조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빈 그릇(empty vessel)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빈 그릇은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하고 위대한 소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빈 그릇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빈 그릇을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분명한 징조로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로마서 8:32)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징조이며,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모든 은혜들이 다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은 모든 은혜의 시작이며 기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영원히 아기로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이시며, 우리를 영원히 인도하시며 다스리실 목자 왕이십니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설 때, 우리 영혼에 잉태되신 이 예수님께서 자라시며 친히 자신이 누구신가를 우리에게 증거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 안에 구원과 하나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이, 그 생명과 능력이, 그 평안과 기쁨이 우리 영혼에 물 흐르듯 쏟아집니다. 우리의 빈 그릇이 넘치도록 채워집니다. 이것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보다 더 확실한 진리입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대신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하스의 요청을 받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곧 군대를 끌고 올라와서 아람 왕국의 수도인 다메섹을 치고, 아람 왕 르신을 죽이고, 또 아람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여기까지는 아하스 왕의 뜻대로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하스가 의지했던 앗수르 왕을 통해 오히려 유다를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17-2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 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후에 앗수르 왕은 유다 땅을 침공하여 겨우 예루살렘을 남겨둔 채 유다의 모든 도성들을 쳐서 무너뜨리고 마치 털을 깎아내듯이 그 땅을 초토화시킵니다 (열왕기 18장).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아기 예수님을 믿는 대신 세상의 권세 있는 자들을 의지할 때, 우리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아기 예수님은 연약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을 받을 때, 우리 안에 은밀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탄생은 우리에게 이 진리를 증거하는 징조입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에게 매일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육체가 믿음의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매일 흘러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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