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마가복음 11:27-33)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3. 6. 05:08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마가복음 11:27-33 

하나님을 지칭하는 여러 칭호들 중에 절대자(the Absolute)”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어는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고 15세기 독일의 카톨릭 교회의 신학자이며 추기경이었던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 “Cusa 사람 니콜라우스라는 )라는 사람이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자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시며,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제한당하거나 다른 어떤 것을 의존하지 않으시며, 또한 모든 것을 초월하여 계시는 영원불변하는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과는 달리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은 존재를 하나님께 의존하는 상대적인 존재들(relative beings)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반면, 상대적인 존재인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지극한 한계를 보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고 (시편 8:1), 땅에 충만하며 (이사야 6:3), 영원합니다 (시편 104:31). 반면에 사람의 영광에 대해서는 모든 육체가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 합니다 (베드로전서 1:24). 생명에 관하여,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창세기 21:33).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십니다 (사도행전 17:25). 반면에 사람의 생명은 호흡과 같으며 (욥기 7:7), 바람과 같이 순식간에 사라져 다시 오지 못합니다 (시편 78:39). 능력에 관하여,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며 (여호수아 22:22), 모든 일이 그의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1:3, 히브리서 11:3). 하지만 사람의 능력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자나 더할 있느냐?” 하십니다 (마태복음 6:27). 일생 손으로 모든 일과 수고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전도서 2:11). 이와 같이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사람들 사이에는 넘을 없이 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대자 하나님 안에서 분의 영광과 생명과 능력을 맛보고 누리며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머리 붙들 우리가 절대자 되신 하나님의 지체가 되어 분의 모든 좋은 것들을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밖에 있으며 하나님을 머리로 붙들지 않을 , 우리가 갖고 있는 영광이나 생명이나 능력이 헛되고 거짓되며 나아가 악하게 됩니다. 영광은 수치가 되고, 생명은 죽음이 되며, 능력은 절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권세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합니다 (유다서 1:25). 우리가 읊조리는 주기도문에서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태복음 6:13). 세상에 있는 모든 권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로마서 13:1절은 말씀하기를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심문하는 빌라도가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면서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알지 못하느냐?” 하자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 (요한복음 19:10-11). 하나님께서 가지신 권세는 절대적 권세 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권세는 상대적 권세라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사람의 생사를 마음대로 정할 있는 막강한 권세가 있다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받은 권세를 올바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서 그를 판단하십니다. 빌라도는 그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신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악한 요구에 굴복하여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있는 권한쯤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권세를 주시는 것은 실상 어떤 또는 책임 맡기시는 것입니다. 일이나 책임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그들이 수행해야 선한 기능입니다.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이 해야 일이 있으며 오직 일을 있도록권세가 부여됩니다. 교통 경찰은 교통 경찰이 해야 일이 있으며 오직 일을 있도록권세가 부여됩니다. 유튜브에 자주 회자되는 영상이 있습니다. 미국의 젊은 여자 교통 경찰이 운전 규칙을 위반한 차량을 잡았습니다. 차에는 상원 의원이 타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신분증과 차량 등록증을 요구하자 마음이 상한 상원 의원은 자네 내가 누군지 알아?” 하면서 어린 여자 경찰을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경찰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상원 의원에게 운전 규칙을 위반한 것과 경찰의 요구에 불응한 것에 대해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녀는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 그녀가 해야 선한 기능 수행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리고 국가가 그녀에게 부여한 권세입니다. 상원 의원은 권세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진 권세는 오직 그가 상원 의원으로서 가진 책임 그의 선한 기능 수행하는데만 사용해야 하며, 심지어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서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의 한계를 넘어서 불법적으로 악하게그것을 사용하려 했으며, 자신을 위해 사적으로그것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공적 권세를 마치 자신의 사유물로 착각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권세 문제삼으면서 하시는 일을 막으려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느뇨?” 그들이 말하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란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양무리들을 돌보시며, 성전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으로 깨끗하게 하신 일을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해야 일입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하는 일이란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를 올리며, 또한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무리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책임 선한 기능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백성들의 제사장이요 서기관이요 장로로 세우시고 그들에게 권세를 주신 목적입니다. 사실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어야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너희들에게 이런 일을 권세를 주셨는데 너희들은 이런 일을 하지 않느냐?”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권세욕뿐이었습니다. 권세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권세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나님도 버리고, 백성들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세를 오직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데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시장바닥으로 바꾸고 그곳에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로서의 책임을 외면하고 맡겨진 선한 기능 수행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없었으며,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의 욕심과 게으름과 무익함 회개하든지, 아니면 권세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백성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권세는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에게 장애물 생겼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해야 일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송하고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 나아와 따졌습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느뇨?” 이들은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신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신 수호자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속셈은 하나였습니다. 자신들의 높은 자리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과 하시는 일을 훼방해야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과 하시는 일을 훼방했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자신들의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이런 일을 권세를 주셨다 대답하실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하십니다 (마태복음 28:18). 요한복음 17: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그리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권세를 주셨는지를 분명하게 기억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혼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는 일을 하시도록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를 번도 자신을 위해 사적으로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시면서 사람들의 굴복을 요구하신 적도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의 대부분을 포기하셨습니다. 무시무시한 권세를 겸손한 육체 속에 감추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묵묵히 자기 부인과 희생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고 제자 마태는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마태복음12:19). 참으로 주님의 삶은 모든 권세자들의 본이 되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오직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자기 욕심을 채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와 밤낮으로 일하시면서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헛된 권세욕 눈이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보고 회개하기는 커녕 앞을 가로막고 물었습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대신 그들에게 반문하셨습니다. “나도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수군대며 의논했습니다. “하늘로서라고 대답하자니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고 책망을 받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반대로, “사람으로서라고 대답하자니, 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로 믿는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웠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들은 그냥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했습니다. 청문회에 못된 정치인들이 곤란한 질문에 대해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하고 대답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그들이 예수님께 했던 짓을 똑같이 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자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1:5). 이를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을 찾아와 시비를 걸었습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복음 1:25). 말하자면 네가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자신이 가진 권세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의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소리라고 합니다. 말씀 되신 예수님을 세상에 전하는 소리입니다. 그는 자신을 순전히 어떤 물리적 기능으로만 인식합니다. 그리고 오직 기능을 수행하는데 자신을 바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여자가 낳은 중에 세례 요한보다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1:11). 이렇게 자임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어떤 기능 스피커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소리 세상을 울리다가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도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은 한결같이 권세 다툼이었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이들의 간악한 속을 드러내는 뼈를 때리는질문이었습니다. 동시에 의로운 권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사유화했습니다. 그리고 권세를 유지하고 누리기 위해서 거짓 일삼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진리인지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여서 수군거리며 함께 악을 도모했습니다. 자신을 속이고 서로를 속이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거짓과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서 예수님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말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유화된 권세 모습입니다. 머리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버렸을 , 권세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원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권세자이면서도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헌신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그의 충성심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1:10).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 말라고 협박하는 대제사장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행전 5:29). 이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마음으로하나님을 경외하며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으로 이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쉽게 말해서 그들이 가짜였기 때문입니다. 머리 되신 절대자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마귀의 종이 가짜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비록 소리 살다가 사라졌지만, 사람들 속에 그는 선지자 남아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권세를 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권세를 포기하시고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빌립보서 2:9-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참된 권세,” “의로운 권세 모습입니다. 권세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권세자 높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함으로써지극히 높으며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얻으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또한 권세자입니다. 요한복음 1:12-13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자들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 믿는 자들에게 주신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권세가 어떤 권세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편의 설교가 필요하지만 그래도 말씀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로마서 8:39 말씀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으리라!” 권세는 종의 권세 아니라 아들의 권세입니다. 권세는 절대자 하나님과의 계약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절대자 하나님과 사랑으로 맺어진 그의 아들이며 딸이라는 것입니다. 권세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피로 보증하는 것이며, 성령께서 영으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자 , 세상은 우리에게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하고 묻습니다. 우리 권세의 증인은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과,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랑 안에 거하며, 우리에게 아들의 권세를 주신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며, 힘써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권세자의 살아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