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3. 13. 04:04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0

브라질의 아마존 상류에는 아마존 강의 지류 하나인 Rio Negro (Black Water) 강과 아마존 강이 만나서 합쳐지는 구간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만난 물줄기는 6km (3.7마일) 정도를 서로 섞이지 않고 흐르는데 이는 물의 밀도, 속도, 온도 등이 서로 달라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강이지만 안에 개의 서로 다른 흐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하나의 거대한 강으로 비유한다면 안에도 가지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 내내 함께 흐르는 개의 물줄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의”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의 ()”입니다. 흐름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그리고 우리 각자의 경험을 통해 보게 되는 세상의 역사와 개인의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죄”는 서로 섞일 없습니다. 하나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며, 다른 하나는 진홍같이 붉은 색을 띠고 있습니다 (이사야 1:18). 서로 다른 흐름 사이에는 숨막히는 긴장이 있고, 많은 대립과 다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떨어지지 않고 내내 하나의 강으로서 함께 달립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죄”가 이렇게 함께 흐르는 것이 가능한 것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죄를 삼켜버리고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흔적도 없이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설교에서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God’s justice)”이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로우심(justness)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의 (our justice)”이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의 양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의의 양식으로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순수한 하나님의 의이십니다. 의는 하나님의 성역(Holy Ground)라고 해야 것입니다. 성역은 침범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도 의를 변개하거나, 다른 의와 섞거나, 완전성과 절대성을 훼손시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는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죄와 함께 흐르지만, 결코 사람들의 죄와 섞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성역(Holy Ground) 있습니다. 어떤 다른 것과 타협하거나 양보할 없는 최고의 가치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고고학자들(archeologists) 오래된 유물들을 발굴하고 연구하여 인류의 역사를 탐구하는 학자들입니다. 그런데 성경 고고학자들(biblical archeologists) 있습니다. 이름에서 유추할 있듯이, 이들은 주로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들임을 입증할 목적으로 고고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순수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학문인 고고학을 성경의 기록과 상관이 없는 순수 과학으로 지키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학문적 순수성이 성경 고증이라는 외부의 목적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내용들이 모든 비전문가들에 의해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순수 고고학은 일종의 성역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인 것입니다. 성역이 이런 전문성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과 같이 독특한 역사를 가진 다민족 국가에서는 자유와 인권과 평등이 성역처럼 다뤄집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가치들에 대해서 가볍거나 경솔하게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유와 인권과 평등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추구하는 이며 최고의 가치라고 있습니다. 개인들도 나름대로의 성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 예를 들어, 사랑하는 가족이나 피땀 흘려 모은 재산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자존심이나 애국심 같은 정신적 숭고함이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최고의 가치를 잃거나 손상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들 또한 성역으로 다뤄집니다. 재난, 전쟁, 죽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개인들에게도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아픈 상처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성역에 발을 들여야 , 우리는 예를 갖추고 올바로 행동해야 합니다. 만일 성역에서 지켜야 법에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몹시 화나게 만들 것이며 이로 인해 매우 심각한 어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이런 성역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의 성전과 모세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행하며 장로들의 유전을 지켰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민족적 자부심 또한 대단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성역들을 모두 여호와 하나님 이름으로 유지하고 집행했습니다. 이것들이야말로 그들의 최고의 가치이며, 그들의 였습니다. 물론 아무도 이들이 앞세우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없었습니다. 당연히 이름으로 구별된 성전과 율법, 그리고 이름으로 세워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거의 하나님과 동일시되는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권세로 자신들의 욕심을 은밀하게 채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외식을 꾸짖으셨습니다. “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근채와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중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마태복음 23:23) “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3:25). 이들의 성역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성전과 율법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성역은 자신들의 탐욕이었습니다. 그리고 탐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의와 인과 신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목은 신성 모독죄였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며, 성전을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시며, 안식일 법을 어기시고, 죄인들, 세리들, 이방인들과 어울리셨기 때문입니다. “성역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성역을 침범하여 그들을 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범하신 성역은 그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범하신 성역은 그들의 탐욕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 뒤에 숨기고 몰래 즐기던 가장 소중한 것들 주님께서 드러내시고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정말 중요한 성역을 범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도 성역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디로 말해서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9:52-56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의 촌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과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몹시 마음이 상한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성경의 다른 사본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더하여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여정에 지친 나그네들을 문전박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야고보와 요한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은 매우 엄중합니다. 우리 말로 하면 너희들 미쳤구나!”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해야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물론 예수님께서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이렇게 무례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까지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불벼락을 맞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며, 예수님의 성역이며, 예수님의 최고의 가치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은 사마리아에서 겪은 일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체포당하시고, 신문받으시고, 성문 밖으로 끌려나가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모든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생명을 구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는 구원의 사랑이 예수님께서 마땅히 이루셔야 이며 최고의 가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주님의 공유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주님께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세상의 죄인들 있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로 나아가시며,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가르치시고 섬기시며, 끝내는 그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런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공유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관심은 예수님의 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같이 빛나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 초막을 짓겠습니다말했습니다 (마태복음 17:1-4). 베드로는 세상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기 싫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서 평화롭게 예수님과 천국의 영광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게 되자, 베드로는 이번에는 칼을 빼어 들고 사람들과 싸웠습니다 (요한복음 18:10). 그는 예수님을 잃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세상을 대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을 ,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을 포기하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누가복음 22:54-62). 폴란드 소설가 헨리크 센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 쿼바디스(Quo Vadis)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제목이 되는 쿼바디스 라틴어로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 전설에 따르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던 베드로가 핍박을 피해 도시를 떠나 도망하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서 로마에 가는 중이다!” 말을 들은 베드로는 회개하고 로마로 돌아가 그곳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구별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없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속으로 돌아가 다시 예전처럼 고기를 잡을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부르시고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들을 섬기는 일꾼으로 세상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그가 그토록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멀리하던 죄인들을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했을 , 베드로는 참으로 세상과 구별된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흙탕물과 함께 흐르지만 물과 섞이지 않는 의로운 물줄기에 합류하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 성경에서 우리는 의로 인해 핍박을 받고 결국에 축복을 받은 사람들의 예들을 찾아볼 있습니다. 누가복음 17:26-30절에서 예수님은 명을 언급하시는데 그들은 노아와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사람은 베드로후서 2:5-8절에도 함께 언급되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노아와 롯은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물로 임한 심판이며, 다른 하나는 불로 임한 심판입니다. 이들이 사는 동안 세상을 흐르는 물은 지극히 혼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 하시며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 하십니다 (누가복음 17:27-28). 이것이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직전의 세상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날들은 전혀 혼탁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즐겁고 흥미로운 일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불경건하고, 음란하며, 불법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노아와 롯은 의로운 사람들이었으며, 또한 의의 전파자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불경건함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가운데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많은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는 세상이 가장 평화롭고 즐겁고 번영하는 날들을 즐기고 있는데, 하나님의 심판을 소리 높여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 세상의 불의한 자들이 형벌을 받는 동안 이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없습니다. 동시에, 세상과 섞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전파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들의 불경건한 삶으로부터 깨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믿기에 이것이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시련이며 심판입니다. 불의한 세상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는 대신,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오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평화와 기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를 붙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시며,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의로움 때문에 예수님은 방울까지, 조각까지 몸으로 고난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주셔서, 우리의 의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향기롭고 세상 죄인들이 먹을만한 의인이 되어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사용될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