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건축자의 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 (마가복음 12:1-1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3. 27. 06:34

건축자의 버린 , 모퉁이의 머릿돌

 마가복음 12:1-12

 

 지난 말씀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농부의 비유 대해서 배웠습니다. 설교의 시작 부분에서 언급했던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중요한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와 동시에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며 또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대주재가 되십니다. 우리의 머리 되십니다. 포도원 농부는 포도 농사도 지어야 하지만, 포도원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포도원 농부들로 하여금 그들이 잊고 떠난 하나님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포도원 농부들은 이런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고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대신, 오히려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마무리하십니다. 10,11 말씀입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함을 읽어보지도 못하였느냐?” 말씀은 시편 118:22-23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서 말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의 나이를 지칭하는 가지 단어들이 있습니다. 20세는 비로소 갓을 쓴다 의미로 약관(弱冠)이라고 하며, 40세는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않는다 뜻으로 불혹(不惑)이라고 합니다. 70세의 나이를 고희(古稀) 또는 종심(從心)이라고 하는데 종심이라는 말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뜻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70 되면 사람의 마음이 순화되어 자연스럽게 법도를 따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아직 나이가 되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참으로 마음이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울 합니다. 성경에도 능히 종심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사도행전 13:22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으시고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뜻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가리켜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마음으로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법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 속에 거하시며, 그를 마음대로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꼭두각시처럼 하나님께 이용당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6:13). 다윗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으로 거하시는 성전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종심 나이가 되었을 마음의 중심에 법도 자리를 잡듯이, 다윗의 마음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리를 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건축자의 버린 이라 말씀하실 , 건축자 누구를 말하며, 그는 무엇을 건축하는 것일까요? 에베소서 2:20-22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말씀에 따르면, 건축자가 짓고 있는 것은 성전입니다. 그리고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입니다. 물론 성전은 영적인 건물입니다. 그리고 건물을 짓는 건축자들은 첫째로 예수님이시며, 둘째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며, 셋째로 우리 각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위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를 닦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고 그에게 베드로 (게바)”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란 바위(rock)”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름을 주시면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Petros) 내가 반석(Petra)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8). 사도 바울 또한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두매 다른 이가 위에 세운다 합니다 (고린도전서 3:10). 성전 건축을 마무리하는 최종적인완성자 우리 각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퉁이 돌로 하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닦아놓은 위에 자신을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는 성전으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 각자는 이미 닦아 놓은 위에 자신을 성전으로 세워가는 건축자입니다. 그리고 건축자로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성전의 모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6:7절은 솔로몬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할 사용된 돌을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 전을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말씀에 따르면, 성전 건축에 사용되는 돌은 그것을 뜨는 채석장에서 미리 정확한 치수와 모양으로 다듬어졌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돌들은 하나둘씩 성전을 짓는 터로 옮겨져 돌이 있어야 자리에 놓여졌습니다. 만일 돌의 크기를 틀리게 했거나 혹은 실수로 원래 설계된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돌을 놓았을 , 돌은 맞지 않아서 사용되지 못하고 버려질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 전설에 따르면, 솔로몬 성전을 지을 커다란 돌이 들어왔는데 돌이 어느 자리에도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건축자들은 돌을 쪽으로 치워놓았습니다. 마침내 모퉁이 머릿돌을 놓을 때가 되자, 건축자들은 채석장에 사람을 보내서 모퉁이 돌로 쓰일 돌을 준비해서 보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채석장에서는 이미 돌을 보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건축자들은 그들이 쪽으로 치워놓았던 돌을 기억하고는 돌을 가져다가 모퉁이 돌이 놓일 자리에 끼워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돌이 치의 오차도 없이 자리에 맞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켜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다고 합니다. 돌은 누가 준비했을까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다니엘 2:34절과 2:45절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가리켜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뜨인 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28:16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말씀을 인용하여 베드로는 이렇게 전합니다.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베드로전서 2:6). 앞에 언급한 솔로몬 성전의 모퉁이 머릿돌로 준비된 커다란 돌을 자리에 끼워 넣자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모퉁이 머릿돌은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치의 오차도 없고 결함도 없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히 합한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모퉁이 머릿돌의 완전함은 하나님께서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많은 시험으로 시험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5). 그러므로 기초 돌로 쓰임을 받기에 합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시험을 마치신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 되십니다. 말은 우리 사람의 손으로 돌의 모양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은 우리 자신을 돌에 맞도록 다듬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오셨을 , 예수님은 마치 어느 자리에도 맞지 않는 같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배척당하시고, 머리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되신 것은 주님께서 오직 하나님께만 맞추어서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을 붙들고 말리면서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태복음 16:21-23).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를 가리켜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입니까? 이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대신, 사람의 뜻을 따라 사람의 일을 하시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어떤 기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서 이런 자신의 기대에 맞추어 행하시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을 예수님께 맞추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맞춰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깨뜨리고 죽이는 입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맞추고 결국 예수님을 닮은,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정이 없이는 결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없습니다. 중간에 넘어지고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점에서 예수님 또한 베드로를 넘어지게 하는 거치는 이라고 있습니다.

 

Michael Card라는 복음송 가수가 만든 “Scandalon (거치는 )”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어 원문은 설교의 끝에 첨부했습니다):

 

                         거치는

선견자들과 선지자들이 오래 전부터 예언했어요

오랫동안 기다렸던 분이 사람들을 넘어지게 것이라고요.

하지만 사람들은 정복하고 죽이는 왕을 기대했어요.

분이 그렇게 온유하고 겸손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는 모든 사람들을 거스르는 진리입니다.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돌입니다.

그들을 부딪히게 하는 바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서진 그에 의해 온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깨어지고 그들의 생명을 잃을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따라 고집스러운 거치는 돌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은 돌을 거쳐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장애물이 되며,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길이 됩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거치는 돌을 알고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아무도 거치는 돌을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냥 돌을 밟고 지나갈 있습니다.

우리도 옛날의 사람들과 같을 있겠네요.

오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걸려 넘어질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날이 올까요?

 

 

노래 가사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거치는 되셨는가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람들은 정복하고 죽이는 기대했는데, 그들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이라고 하기는 너무나 온유하시고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온유하시고 겸손하셔서 죄인들을 위해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겸손하신 왕을 사람들은 받아들일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Scandalon)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과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버리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하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모퉁이 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또한 깨어지고 부서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위에 세워지기 위해 우리 자신을 다듬는 과정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과정을 피할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거치는 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돌과 부딪힐 회개하고 돌이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으로써,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는 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돌과 부딪힐 회개하고 돌이키는 대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며 돌을 밟고 지나 계속 자신의 길을 갑니다. 길은 멸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바르트(Karl Barth)라는 독일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했는데, 사람은 사람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창조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를 짓기 위해 시온에 두신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아니라, 내가 집을 짓기 위해 나의 세상 정욕에 맞추어 깎고 다듬은 우상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종심(從心)” 경지에 이를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순종하기 위해 나를 깨고 부수는 과정을 거치는 대신, 그냥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으로 바꿈으로써 얻어진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법으로 바꾸면 법은 우리의 삶을 거스르지 않는 순하고 평범한, 그리고 쓸모 없는 헛소리 되고 맙니다. 이렇게 거치는 피함으로써 우리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면 우리는 이미 멸망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건축자의 버린 이며, 다른 하나는 모퉁이의 머릿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건축자의 버린 되시는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버림 받으신 모습 그대로 인생의 모퉁이 머릿돌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이미 모든 시험들을 통과하신 가장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로 영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주님의 모습을 본받기 위해서 세상에서 버려지는 고난을 감당하면서 깨지고 부서지는 가운데 오히려 겸손하고 온유하게 세상의 영혼들을 섬기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세워가는 인생 집에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머릿돌 되심을 발견하게 것입니다.  예수님은 건축자의 버린 되시며, “모퉁이의 머릿돌 되십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이 위에 견고히 세워져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은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Scandalon

                                                                   By Michael Card

 

The seers and the prophets had foretold it long ago

That the long awaited one would make men stumble

But they were looking for a king to conquer and to kill

Who'd have ever thought He'd be so weak and humble

 

He will be the truth that will offend them one and all

A stone that makes men stumble

And a rock that makes them fall

Many will be broken so that He can make them whole

And many will be crushed and lose their own soul

 

Along the path of life there lies a stubborn Scandalon

And all who come this way must be offended

To some He is a barrier, To others He's the way

For all should know the scandal of believing

 

It seems today the Scandalon offends no one at all

The image we present can be stepped over

Could it be that we are like the others long ago

Will we ever learn that all who come must stum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