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마가복음 12:13-1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5. 1. 04:30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마가복음 12:13-17

 

한국 속담에 처녀가 아이를 배도 말이 있다 말이 있습니다. 혼인을 하지 않은 처녀가 아기를 갖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일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을 있다는 말입니다. 있어서는 일이 일어났다고 무조건 비난하고 책망하기에 앞서, 우선은 어떤 사정이 있는지를 들어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야곱에게는 두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유다는 그들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유다 또한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인 엘이 다말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얻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 엘이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므로 죽었습니다. 사이에 자식이 없으므로, 당시의 관습을 따라서, 시아버지 유다는 며느리 다말로 하여금 둘째 아들 오난과 동침하게 하여 아들의 대를 이을 자식을 얻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오난 또한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므로 죽었습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셋째 아들 셀라가 성인이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셀라가 성인이 후에도 다말과의 동침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셀라마저 여호와께 죽임을 당할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에 다말은 자신의 얼굴을 가려 정체를 숨기고 그녀의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합니다. 그리고 아기를 잉태하게 됩니다. 후에 며느리 다말이 아이를 것을 알게 유다는 그녀의 행음함 인하여 끌어내어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에게 자신을 잉태시킨 남자가 누구이며, 자신이 그렇게 행하였는지를 알립니다.  이를 들은 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남편 없는 여자가 잉태했다는 사실만을 놓고 보면 다말은 행음한 여자로 정죄당하고 죽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녀가 옳았습니다. 다말은 후에 쌍동이 형제를 낳았으며, 베레스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3).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겪고 있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죽은 남편의 대를 이을 아들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마땅히 지켜야 사회적 규범들이 있었습니다. 규범들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만큼 엄중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정 없이 시아버지의 부름을 기다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수없이 많은 기도와 고민과 생각 가운데 시아버지를 통해 잉태하는 일을 하기로 결정했을 것입니다. 그녀로 하여금 이렇게 어렵고 위험한 결정을 하도록 이끈 마음 속의 생각이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말한다면, 저는 마디로 덕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녀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문제들은 자신이 만든 것도, 자신이 해결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해야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이 되도록지혜롭고, 용기 있고, 심지어 사랑스럽게 행동했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녀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고의로 일이 되지 않도록행동한 그녀의 남편들이 하나님께 죽임을 당한 것과 대조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말의 복잡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제를 단순화시켜 간음을 했어 했어? 다른 남자랑 잤어 잤어? 그것만 말해!” 하고 다그칩니다. 아무런 변명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칼을 높이 들고 서서 했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마치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들은 덕을 세우기 위해서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이들이 파괴자(destroyer)”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해 있습니다. 13 말씀입니다.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여기서 저희 마가복음 11:27절에 언급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욕심으로 하나가 무리입니다 (마가복음 12:12).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꼬투리 삼아서 예수님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일을 위해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 사람을 뽑아서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서로 전혀 다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엄격하게 지키며, 스스로를 매우 경건하고 순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헤롯당은 로마 황제 가이사의 대리인 격인 헤롯왕의 통치를 지지하면서, 당시 세계의 주류 문화였던 그리스-로마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향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배타적인 바리새인들과 개방적인 헤롯당 사이에는 많은 갈등들이 있었습니다. 그룹 사이에 특히 오랫동안 논쟁이 되었던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세금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의 통치를 반대하며 따라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습니다. 반면 헤롯당 사람들은 로마의 통치를 옹호했으며 따라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 사이에 오랫동안 숙제로 남아있는 난제를 들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14-15a 말씀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이들은 먼저 예수님을 높이 띄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이들의 말은 일면 옳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원하는 책잡을 하시도록 촉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오직 -아니오로만 답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질문에 또는 아니오 답하심으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나 헤롯당 어느 무리와 대립하셔야 했습니다. 만일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한다 대답하시면 이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고 억압하는 이방의 원수들을 옹호하는 매국노 발언일 있습니다. 반대로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서는 안된다 하시면 로마 황제 가이사의 통치를 거부하는 반역죄 처할 있습니다. 세금 문제는 그들 스스로도 오랫동안 결론을 내지 못한 매우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행정적, 문화적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복잡한 문제를 -아니오질문으로 지극히 단순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리고 아무런 변명의 여지도 없이,  매국노가 되든지 반역자가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교묘한 덫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함 아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시험하느냐?”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름을 말합니다. 이들은 입으로 예수님을 높이지만 속은 살인심으로 가득합니다. 이들의 자체가 거짓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거짓된 삶을 사는 이유는 누군가를 해치고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과 해롯당은 서로 생각이 너무 달라서 근본적으로 결코 화합할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가?”라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라고 하시든 아니오라고 하시든, 그들은 말을 잡아서 예수님을 잡아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가 어떤 사람의 생사 가를 만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한 또는 아니오 입장을 가진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서로를 죽일만큼 적대하고 대립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함께 발벗고 나섰습니다. “공동의 이익 추구하는데 있어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입장 차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매일 술자리에 모여 앉아 낄낄거리며 다투는 케케묵은 세상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것입니다. 이들은 지극히 거짓되며 살인적입니다. 말하자면 마귀적입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앞에 언급한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서 비슷한 모습을 있습니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게 연유는 이러합니다. 다말이 자신의 얼굴과 몸을 가린 채로  시부 유다가 지나는 길목에 앉았습니다. 이를 유다는 그녀를 몸을 파는 여자 생각하고 그녀에게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 유다는 마치 지나는 길에 목이 말라 자동 판매기에서 콜라 병을 마시듯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렇게 모르는 여인과 간음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아무 일도 아닌 아주 금방 그가 짓을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후에 다말이 아이를 잉태한 것을 알았을 , 그는 크게 분노하며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하였습니다. 자신에게는 한낱 심심풀이 오락 불과한 것이 다말에게는 불에 죽을 무서운 것입니다. 결국 다말을 잉태케 사람이 자신인 것을 알게 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일을 초래한 자신의 잘못이 훨씬 것과, 심지어 며느리 다말이 참으로 목숨을 걸고 용기 있게옳은 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진실 드러났을 , 다말의 생명도 보전되고 그녀가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일이 세워지는해피 엔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악한 꾀가 예수님 앞에 드러나고 이로 인해 예수님의 책망을 받고도 그들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은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마가복음 3:6절은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합니다. 이들이 이런 나쁜 생각을 하게 됐을까요? 이는 자신들이 죽이고 파괴하는 자들 반면, 예수님께서는 살리시고 세우시는 이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마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의 병든 손을 고치십니다. 사람들은 장애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던 사람이 이제 예수님의 은혜로 온전한 손을 갖게 것에 대해서 함께 기뻐하며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들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 이유로 주님을 고소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님의 질문은 먹은 어린 아이라도 쉽게 대답할 있는 너무나 간단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문제에 가부간 답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악한 속을 드러내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이들은 그냥 묵비권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비추시는 진리의 앞에서 문을 닫아버리고 어둠 속에 남아있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둠으로 되신 예수님을 죽이고 빛을 어둠으로 덮어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요한복음 3:17-19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이니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악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자신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나리온 당시 통용되던 로마 제국이 발행한 은전(silver coin)으로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0:2).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은전에는 가이사의 얼굴과 그의 타이틀 (CAESAR) 이름(AUGUSTUS)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져온 데나리온을 보이시며 질문하셨습니다. “ 화상과 글이 것이냐?” 이에 저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하는 이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또는 아니오라고 대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바리새인들에게는 바리새인에게 맞고 헤롯당에게는 헤롯당에게 맞는 대답을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반면 헤롯당은 로마 황제 가이사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환영하며 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이사의 가이사에게 바치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제기된 질문에 대해서 답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돌려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어떤 것이 가이사의 이며,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인지는 그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책임질 일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세금을 내서 매국노가 되든, 세금을 내지 않아서 반역자가 되든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진 데나리온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거래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은전에 황제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드려지는성전세 (지금의 교회 헌금과 비슷한) 내는데 은전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신에 성전세를 내는데 사용하도록 그들이 지정한 화폐가 따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데나리온 은전을 성전세 납부용 은전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마가복음 11:15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고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바꾸는 자들 바로 데나리온을 성전세 납부용 은전으로 환전해주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환전 서비스 통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져온 데나리온은 모두 이들의 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저녁때 사람들이 가고 나면, 헌금통을 열어 거기 모인 성전세 납부용 은전을 회수하고, 다음날 다시 바꾸는 위에 그것을 쌓아 놓고 성전을 찾아오는 예배자들의 데나리온을 사들였습니다. 이렇게 돈을 버는 것은 정말 집고 헤엄치기였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데나리온이 가이사의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부정한 이라고 거부했지만, 실상은 돈을 모아 자신들의 금고를 채웠습니다. 반대로, 성전세 납부용 은화를 오직 하나님께 드려지는 화폐 신성시 하였지만, 이들에게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물을 도적질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실상 악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가이사의 없고 하나님의 없었습니다. 오직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인양,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 충성하는 사람인양 얼굴을 붉히며 예수님께 달려들어 따져 물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내면은 대한 욕심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도, 가이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며 세상의 영혼들을 사랑하시고 섬기시는 예수님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추악함은 차마 눈을 뜨고 없을 지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의 교묘한 덫을 피하시기 위한 꼼수 아닙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자에게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로마서 13:7). 고린도전서 10:23-24절에서 말하기를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을 의미있게 하는 것은 옳은 (lawful)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을 의미있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덕을 세우는 하는 것입니다. 다말은 비록 유다 집안으로 시집을 왔지만 남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을 의무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남편과 형제들은 악하며 일에 비협조적이었고, 시부 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그냥 조용히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평안한 날들을 즐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악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간음한 여자라를 오명을 쓰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덕을 세우는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며 오직 예수님만 죄가 없으십니다. 이런 예수님이야말로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세상의 불의한 사람들을 정죄하시고 그들을 진멸(destroy)하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품으시며, 병자들을 고치시고,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시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심지어 죄인 자리에까지 낮아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져서 약하고 악한 우리들을 붙드시고 세우셨습니다. 제가 성경을 통해 배우고 아는 , 예수님께서는 한번도 무엇인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또는 누군가를 해치거나 쓰러뜨리기 위해 손가락을 한번 까딱하신 적도, 마음을 살짝 움직이신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오직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덕을 세우는 드려지셨습니다. 심지어 로마 황제 가이사도 주님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거짓된 위선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마치 순전한 음식 같아서 우리가 마음껏 먹고 마실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또한 하나님과 이웃들에 대해 같은 마음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사랑의 외에는 아무에게든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말씀합니다 (로마서 13:8).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더라도 여전히 사랑의 안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전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덕을 세우는 드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정당한이유로도 누군가를 해코지할 생각은 꿈에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노력으로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빚을 전혀 갚을 없을 것입니다. 그냥 계속 사랑하면서, 사랑의 빚을 갚으면서 뿐입니다. 우리를 복된 삶으로 초대하신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복된 삶을 끝까지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