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맹세하지 말라 (마태복음 5:33-3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4. 17. 04:43

맹세하지 말라

 

마태복음 5:33-37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한자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그만 칼을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칼을 다시 찾기 위해 칼이 떨어진 자리를 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배 난간에 그 자리를 표시를 했습니다. 당연히 배는 앞으로 움직이고 곧 칼을 떨어뜨린 자리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 사람이 배에 남긴 표시는 더 이상 칼을 떨어뜨린 자리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배 위에 어떤 정해진 지점을 표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본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잃어버렸는가?”를 알고, 그 잃어버린 것을 찾아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그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되고 그리고 우리 본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도 잊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가장 경건한종교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줄 것이라고 믿는 많은 표시들곧 경건한 삶의 지침이 되는 교훈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였느니라하십니다 (마태복음 15:9). 그들은 하나님 대신 유대교라는 종교를 선택했습니다. 이 종교는 세상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난파선과 같았습니다. 그 배 안에는 올바른 항해를 위한 온갖 지침들이 가득했습니다. 성결을 위한, 행복을 위한, 성공을 위한, 안전을 위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많은 교훈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 가지 없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침반 (compass)”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신들이 타고 있는 자체가 항상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나침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도 듣지 않고,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5장의 후반부인 21-48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사람들의 삶에 기준이 되어온 몇 가지 중요한 표시들을 옮기는 작업을 하십니다. 이것들은 살인에 관한 (21-26), 그리고 간음 (27-30), 이혼 (31-32), 맹세 (33-37), 원수 갚음 (38-42),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수 사랑 (43-47)에 관한 교훈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사람들이 말한 바 OOO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익숙한 옛 교훈들을 소개하십니다. 그리고는 이런 옛 교훈들을 대신할 훨씬 더 참되고 사랑스러운교훈들을 주십니다. 이 교훈들이 훨씬 더 참되고 사랑스러운 것은 이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며, 이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48).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신 여러 세세한 교훈들을 모두 포괄하는 대명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훈들의 근본 토대가 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본은 우리가 잃어버린 바, 그리고 우리가 잊어버린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기억하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예수님의 맹세에 대한 교훈또한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3-34a절 말씀입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 레위기 19:12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또 신명기 23:21a절은 네 하나님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고 하며, 전도서 5:5절에는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합니다. 구약의 말씀들은 맹세를 완전히 금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신중하고 무겁게 접근합니다. 이는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걸린 일이며, 또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예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로도 말고, 땅으로도 말고, 예루살렘으로도 말고, 자신의 머리로도 말라고 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히브리서 6:16절에서 맹세에 대한 정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이 말씀으로 볼 때, 맹세란 어떤 다투는 일을 확정하기 위해서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그 일의 옳음 또는 사실임을 못박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맹세의 효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주로 신적 권위를 가진 존재를 증인으로 호출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맹세가 헛 맹세일 경우 그 신의 이름으로 죽음의 형벌을 달게 받겠다는 약속으로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맹세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하나님을 보증인으로 세우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맹세의 의미를 생각하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맹세를 하는 몇 가지 이야기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헤롯왕의 맹세입니다. 분봉왕 헤롯은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춤을 추어 자기와 축하객들을 기쁘게 한 헤로디아의 딸에게 맹세하여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마가복음 6:22-23). 헤롯은 아마도 이 어린 소녀가 바비 인형이나 최신형 아이패드를 구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 한 맹세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대제사장의 집에서 신문을 받고 계실 때, 바깥 뜰에 앉아 상황을 살피던 베드로에게 한 여종이 다가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크게 놀라 맹세하고부인하여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6:72). 베드로는 겨우 몇 시간 전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마태복음 26:35) 하고 거듭 맹세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른 맹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3장에 나오는 바,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맹세하기를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의 맹세들은 모두 아름답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신의 이름으로 보증하기에는 너무 무분별하거나, 거짓되거나, 악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들은 맹세를 하는 걸까요? 이는 를 세상의 중심으로 못박고 싶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늘 나를 향해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진실하고 신실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늘 나의 이익을 위해 진실하시고 신실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명예와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들러리로 사용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맹세의 결과들은 매우 참담합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세 경우의 맹세들은 모두 의인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헤롯의 맹세는 원치 않았지만 세례 요한의 죽음을 초래했으며, 베드로의 맹세는 예수님의 죽음을 방관했으며, 유대인 결사대의 맹세는 똑바로 사도 바울의 죽음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들의 맹세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죄로 인해 의인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악을 범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하는 맹세의 본질인 것입니다. 한 해설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악한 사람일수록 자신들이 한 맹세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일수록 맹세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The worse men are, the less they are bound by oaths; the better they are, the less there is need for them).”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사람들의 헛 맹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맹세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6:17-1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중 보증(약속과 맹세)을 통해 보증하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변하지 않으며 (faithful), 하나님께서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는 (truthful)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신 약속은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19절에서는 이 소망을 가리켜 튼튼하고 견고한 우리 영혼의 닻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혼란한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더라도 늘 우리 영혼을 붙들어주는 닻과 같습니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5장에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5) 하시고 또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7)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앞에서 맹세하시고 또 자신을 그 맹세 아래 가두시는 서약식을 거행하셨습니다. 그것은 동물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둘로 쪼개고 양쪽으로 마주보게 대하여 놓고 그 가운데를 지나가는 의식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본래 계약 당사자인 쌍방이 함께 걸으면서, 만일 둘 중 어느 하나가 언약을 어긴다면 둘로 쪼개진 그 동물들처럼 그 생명을 내놓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앞에서 행하신 이 의식에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홀로 희생 제물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겠다고 일방적으로맹세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7:22절은 예수님을 가리켜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라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첫 언약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지 못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맹세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셔서 이 첫 언약의 실패를 보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피를 통해 더 좋은 언약을 위한 새로운 서약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십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기를 드려 모든 이를 위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으며 (히브리서 7:27;9:12), 또한 영원히 항상 살아계신 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심으로 자신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7:24-25).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이 얼마나 연약하며, 악하며, 또 변화무쌍한지를 잘 아십니다. 이런 사람들과 어떤 약속을 하시고 또 그 약속을 맹세로 보증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저라면 이런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하십니다. 심지어 원수 같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희생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약속하시고 맹세하십니다. 그리고 이 맹세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로 보증한 것입니다. 이 피를 믿는 자들에게 반드시 이루어지는 구원과 생명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로 하신 이 맹세가 성경이 말씀하는 맹세의 참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거움은 죄인 된 우리의 약함과 연약함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3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우리가 바다를 항해할 때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나침반의 침은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한 쪽은 북쪽(N), 그리고 다른 한 쪽은 남쪽(S)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항해자는 어디에 있든지 나침반을 이용하여 금방 자신이 어느 방향을 향하여 항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십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은 우리 신앙 항해의 목표가 되는 북극성 (North Star)”과 같으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늘 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가리키며 우리를 인도하는 나침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오직 예수님께서 가리키시는 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향해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것이 바로 우리 신자들의 의(righteousness)라고 합니다. 그의 글 On Men’s Perfection in Righteousness에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의 의란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영광의 눈으로 보시기에 완전하고 충만한 사랑이 거하는 완전하고 충만한 의를 향하여 힘써 나아가는 것입니다 (Our righteousness in this pilgrimage is this - that we press forward to that perfect and full righteousness in which there shall be perfect and full love in the sight of His glory).” 말은 순례의 여정 동안 우리 각자가 의와 사랑에서 완전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아들의 피로 맹세하신 소망을 향해서 매일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완전한 신실함이나 진실함에 대해 땅에서 맹세로 확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맹세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각주구검의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만 일은 매일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나침반의 바늘은 오직 예수님께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Yes)’ 하나님의 아니오(No)’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때만 유효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유일한 참된 맹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과 생명의 보증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닻에 꽁꽁 묶어야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소망을 향한 우리의 순례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도록, 길을 잃지 않도록, 느려지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