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예수님의 주 되심 (마가복음 11:1-1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2. 20. 05:07

예수님의 되심

 

마가복음 11:1-10

 

옛날 어느 마을에 부모님께 대한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남다른 효심에 대한 명성이 자자해서, 그가 사는 마을을 넘어서 마침내 나라의 임금님까지 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그를 직접 보고 싶기도 하고 상을 주기 위해서 효성이 지극한 사람을 궁궐로 불렀습니다. 그가 임금님 앞에 나아왔을 왕은 그의 효성을 칭찬하면서 동시에 짓궂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놀려줄 생각에 그에게 곤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대는 부모에 대한 효성과 임금에 대한 충성 어떤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단순하지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었습니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중요합니다라고 대답한다면, 나라의 백성으로 임금님께 무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극한 효성 때문에 유명해지고 이로 인해 임금님 앞에까지 불려온 마당에 임금에 대한 충성이 중요합니다라고 대답한다면 그것도 꼴사나운 일이 것입니다. 이래저래 잘못 대답하면 상을 받으러 왔다가 곤장만 맞고 돌아갈 곤란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라가 평안할 때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임금님께 충성하는 것이요, 나라가 어려울 때는 나가 싸워 임금님께 충성하는 것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찌 충과 효가 다르다 하겠습니까?” 말을 들은 임금님은 그의 고운 마음과 지혜로움에 크게 감탄하며, 본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생각에 사람의 지혜는 사랑에서 나왔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가장 중요해!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아!” 이런 마음으로 효도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냥 순전한 마음으로 부모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도, 자신의 이웃들도, 그리고 임금님도 같은 사랑으로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순전한 사랑으로 나라의 임금님까지 감동을 시킨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장면을 가리켜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앞서고 뒤따르며, “호산나 외치며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라고 하며,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바로 선지자이시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의 왕이심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9: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가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시자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자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위해 다윗의 왕국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이 예수님을 크게 환영한 이유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으로 영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다른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나운 욕심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자신들을 대신하여 싸우고, 자신들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줄 대리인(agent)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을 에워싸고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 속은 사나운 욕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슬프게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Lord)” 되실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있었던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타실 나귀 새끼를 구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워오자 예수님께서는 제자 둘을 맞은 마을에 보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그리고 더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제자들이 가서 보니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귀 새끼 마리가 거리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나귀를 풀어 끌고 가려고 하자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대답했습니다. “주가 쓰실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흔쾌히 새끼 나귀를 끌고 가도록 했습니다. 이야기는 작은 에피소드이지만 눈에는 마치 아무런 첨가물이 들어있지 않는 순전한 오개닉 같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그대로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사람의 꾀나 힘씀이나 간섭이나 다툼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순전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우리의 눈을 끄는 내용들이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입니다. 하나는 주가 쓰시겠다 하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즉시 보내리라하십니다.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되심 이해할 있습니다. 예수님의 되심, 우리는 욕심 통해서 아니라, 오직 주께서 하신 말씀과 주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끌고 가려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이리 하느냐?” 하고 물을 주가 쓰시겠다 대답하라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라고 하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Lord)”라고 부른다든가 혹은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자신이 임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가 나에 대해서 어떤 권세(authority)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나에게 권력을 행사하며, 나는 사람의 주권에 복종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우리는 많은 - 관계를 있습니다. 세상에서 있는 이런 - 관계는 대부분 이기적이며 정치적인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높은 자리에 오르며 권세를 갖기를 원합니다. 스스로 주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 특히 권력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점에서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이며, 또한 정치적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한 것도 이렇게 이해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진정한 왕은 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의 이기심을 만족시켜줄 정치적인 이며 대리인(agent)”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을 위해 많은 주들(lords)” 주위에 두고, 그런 주들을 높이고 위함으로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효성이 지극한 사람도 만일 이기적이고 정치적이었다면 그는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성 어떤 것이 중하냐?” 질문에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는 마음 속에 임금과 부모 어떤 (lord) 선택하는 것이 내게 유리할까?” 대해 생각하고 계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벌을 받지 않고 상을 받기 위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헛소리를 하다가 곤장을 맞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효성은 이기적이고 정치적인 계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황하지 않고 담대하고 분명하게 임금님의 질문에 대답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진심이 임금님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부모님보다, 그리고 임금님보다 높은 있었습니다. 그가 항상 순종하는 하늘의 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임금님께 충성하고, 이웃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5-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는 사실은 우리에게 아버지하나님이 계시며, “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명의 갖고 있다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땅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지만 분은 분이시며, 서로 사랑으로 맺어져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듯 예수님을 위해야 하며, 예수님을 위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위의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말하기를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임금님께 충성하는 것이며, 임금님께 충성하는 것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자식이 임금을 위해 전쟁터에 나아가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이기적인 부모나, 반대로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하기를 요구하는 이기적인 임금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임금이 오직 자기에게만 충성을 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효성 지극한 사람이 말한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임금님께 충성하는 이라는 대답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런 분들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세상 만물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나왔으며, 은혜와 사랑을 먹고 살며,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110: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수로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되심 증거하시기 위해 친히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44, 마가복음 12:36). 여기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 서로 구별되는 존재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윗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요 (lord)” 세우신 사람이지만, 그의 앞에는 여호와께서 세우신 주의 (Lord of lords)”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수로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우편에 앉으라하십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만 남기까지, 세상의 모든 다른 거짓 신들과 주들로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그리고 우리 각자의 영혼 속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마음 속의 모든 우상들을 제하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나의 고백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제는 모두 누가 나의 궁극적인 주님이신가?” 관한 것이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말하자 나귀 새끼의 주인은 즉시이를 허락했습니다. 이는 제자들의 대답이 그것으로 충분했음을 보여줍니다. “주가 쓰시겠다 말을 들었을 , 이상 ?”라는 질문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육군본부의 정보참모부에서 군대 생활을 했습니다. 참모부장님은 개를 소장이었으며, 제가 속한 과의 과장님의 계급은 대령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참모부장실로부터 부장님이 과장님을 찾는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그러면 과장님께 부장님께서 부르십니다이렇게 말을 전합니다. 말을 들은 과장님은 쏜살같이 이층에 있는 참모부장실로 달려갑니다. 계단을 오를 때도 걸음에 계단씩 올라갑니다. 과장님이 저에게 부장님이 나를 찾으신대?” 하며 물어본 적이 번도 없습니다. 그냥 부장님이 부르십니다 말이 지체 높으신 영관 장교를 뛰게 만들 충분한 이유가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심지어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풀어서 끌고 가려는 제자들을 보고 나귀의 주인은 몹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임을 , 주인이 매우 아끼고 사랑했던 동물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가 쓰시겠다 말을 들었을 그에게 아무런 의문도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그의 아끼는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 양보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의 되심 하늘의 해처럼 밝게 빛나고 있다면, 우리의 또한 이렇게 밝고 명확해지게 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길이고 무엇이 길이 아닌지, 무엇이 지혜로운 것이며 무엇이 어리석은 것인지를 밝히 있게 됩니다. 그리고 길을 지체 없이 따르게 됩니다. 반대로, 사단 마귀는 네가 주인이야!” “네가 최고야!” “ 생명이 가장 중요한 거야!” 하며 우리의 눈과 마음을 흐리게 만듭니다. 사단이 이렇게 우리 마음을 미혹하는 것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속여 결국 마귀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주가 쓰시겠다 말씀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말씀을 순종하는데 걸림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며 원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상들과 원수들을 예수님의 앞에 엎드리게 하며, 오직 예수님만이 되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타시기로 정하신 동물은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입니다. 나귀가 사람이나 짐을 실어 나르는 하는 동물임을 생각하면, 나귀 새끼는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아기로 오실 때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 마리아 몸을 빌려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몸이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무덤 뉘였습니다 (누가복음 23:53).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는 나귀 새끼 택하신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오직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다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사랑과 헌신의 제물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에게로부터 나온 , 그리고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것만을 받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16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NIV 영어 성경에서는 원하는 달음박질 하는 사람의 욕심이나 노력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 타실 말이 필요한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예수님께 크고 훌륭한 말을 가져올 사람들이 아마도 다투어 줄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준비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사랑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되신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나, 요구할 것이나,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것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다니엘 2:34절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켜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이라고 합니다. 우리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 요한복음 1:13절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자들이라고 합니다.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과 예수님을 믿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홀로, 오직 능력과 사랑만으로 이루신 은혜인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른 있을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주가 되심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가 되실 ,  나는 겸손한 사랑을 배우고 순종하여 임금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기도 하며, 부모님의 효성스러운 자녀가 되기도 하며, 이웃들에게 착하고 친절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가 되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밝고,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가 되실 내가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각자에게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