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고상한 사람 바디매오 (마가복음 10:46-5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2. 6. 04:59

고상한 사람 바디매오

 

마가복음 10:46-52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고상한 사람 바디매오라고 붙였습니다. 물론 제가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바디매오를 고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상한 사람일까요? 고상하다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보고 싶습니다. 영어 이름 중에 유진(Eugene)”이라는 남자 이름이 있습니다. 제가 영어 이름을 짓게 된다면 갖고 싶은 이름들 하나입니다. Eugene이라는 이름은 고대 헬라어에서 것인데 뜻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좋은 (Eu) + 유전자 (Gene)”라는 말입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혹은 근본 성품이 좋은 사람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상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Eugene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도 찾아볼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형용사(adjective) 사용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7:11 말씀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 말씀 신사적이라는 말의 헬라 원어가 유게네스(eugenes)”인데, KJV 비롯한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말을 고상한(noble)”이라고 번역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고상한 성품이 어떻게 드러납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것이 진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성경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입니다. 한글 성경에 고상하다 번역된 말도 있습니다. 빌립보서 3:8a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고상하다 말의 뜻은 가장 좋은 ,” “다른 것과 비교할 없는 ,” “그것을 위해서라면 다른 어떤 것이라도 포기할 있는 의미합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가장 좋은 것이며 외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에게 오히려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또한 사도 바울 자신의 고상함 것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고상하다 말의 쓰임을 보자면, 뜻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혹은 근본 성품이 좋은 사람과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상한가는 그의 출신 성분이나 그의 성품보다는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또는 그가 가장 가치있다고 여기는 무엇인가를 통해서 있습니다. 개인의 고상함은 그가 최선을 다해서 추구하고 얻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통해서 판단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통해서 다른 사람의 고상함을 판단합니다. “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부자인지를 통해, “건강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건강한지를 통해, 지위와 권력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높은지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고상함 판단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바디매오는 결코 고상할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난한 소경 거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성경적으로 보면그는 매우 고상한 사람입니다. 그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베뢰아 사람들과 같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기는 바울과 같습니다. 그는 가장 귀한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고상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귀한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바로 천박한것입니다. 그가 부자라도, 그가 건강하더라도, 그가 높은 지위에 있더라도 그가 간절히 원하고 추구하는 것이 가장 귀한 아니라면 사람은 천박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귀한 이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46 말씀입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가에 앉았다가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에 여리고에 들르셨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15마일(24km) 정도 떨어져 있는 요단강 서쪽 편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여리고는 바다 표면보다도 250m 낮아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여리고는 기온이 따뜻하고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여 여러 농산물들의 주산지였습니다. 헤롯 대왕은 이곳에 자신의 겨울 궁전을 지어놓고 이용했으며 죽을 때도 그곳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살기가 좋은 곳이었겠지요? 아름다운 요단강가에, 종려나무 가지가 우거지고, 거리는 상인들과 여행객들로 붐비는 도시의 풍요롭고 활기찬 모습을 상상하면 이곳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별로 없을 합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방문하셨다는 기록은 군데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일과 누가복음 19:1-10절에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지나가시다가 세리장 삭개오를 만나신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건은 모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마지막 여정에 일어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복음서의 기록만을 보자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의 마지막 때에 그리고 아주 잠깐 여리고 성을 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시를 지나가실 때의 광경이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46절에는 허다한 무리 예수님과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삭개오와의 만남을 그린 누가복음 19장에서도 삭개오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려고 했는데 사람이 많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9:3). 아마도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방문하셨을 예수님의 명성을 들어왔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수님을 겹겹이 에워싸고 함께 움직였던 같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여리고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오직 당시 사회에서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던 소경 거지 바디매오와 세리장 삭개오만 이름을 성경에 올린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입니다.

 

본문에는 바디매오에 관한 간단한 소개가 있습니다. 그는 디매오라는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사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이 디매오의 아들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가리켜 바요나 시몬아이렇게 부르실 때가 있는데 (마태복음 16:17), 이것을 다른 곳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이렇게 기록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21:15). 바디매오는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대신 사람들에게 “OOO 아들로만 알려졌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디매오라는 이름이 나올 , 성경 저자는 계속 그를 소경이라고 칭합니다 (49, 50, 51). 이것이 그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소경이며 거지였습니다. 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으며, 그가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는 줄기 빛도 없는 흑암 속에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사람으로 카운트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는 죽은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47 말씀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의 이름은 빛이요 생명이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을 마치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조난자가 지나가는 배를 부르듯이 필사적으로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잠잠하기는 커녕 더욱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실을 말하자면, 여리고 성의 거리에 없이 많은 사람들이 넘쳐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지만, 가운데 살아있는 사람은 오직 사람 바디매오 뿐입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들었을 , 이름을 구원자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들었을 , 이름을 부르며 그의 긍휼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고상한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으며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자입니다. 여리고 성은 날씨도 따뜻하고, 많은 상인들과 인심 좋은 여행객들로 붐비는 곳입니다. 바디매오 같은 소경 거지가 지내기 좋은 곳입니다. 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바디매오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겸손하게 군다면, 최소한 굶어 죽을 일은 없습니다. 한국 속담에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비난을 무릅쓰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정말 전심으로불렀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예수님만 밝히실 있는 어둠이 있었으며, 오직 예수님만 치료하실 있는 죽음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송충이 아니며, 따라서 솔잎으로 만족할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세상에서 같은 제사장으로 살도록 지으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있을 , 우리는 당연히 어둠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은혜의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해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은혜의 하나님을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불을 밝히고 자신의 길을 갑니다. 제가 설교에서 인용하기를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50:10-11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자여 너희가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지어다 너희가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말씀에 가지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사람은 흑암 중에 행하며 빛이 없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횃불을 피워 횃불로 자신을 둘러싼 입니다. 스스로 횃불을 피워 빛으로 자신을 둘러싼 사람은 그가 가진 부와 명성과 건강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세상에서 고귀한 인정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것은 슬픔 중에 눕는 입니다. 그는 많은 횃불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지만 불이 꺼질 어둠 속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와 함께 그는 존귀함도 잃게 됩니다. 결국은 그가 가진 것이 오히려 되는 것입니다. 고상한 사람은 컴컴한 어둠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빛을 발견하는 자입니다. 바디매오가 그랬습니다.

 

바디매오의 간절히 부르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에 바디매오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참으로 고상한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빛을 발견하고 빛을 누리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앞에 나아가는 바디매오의 모습은 이상 소경도 거지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겉옷 부끄러움을 가려주고 몸을 추위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데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특히 하루 종일 가에 앉아 구걸을 하는 바디매오에게는 겉옷이 자신의 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것이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의 가장 소원을 말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주저 없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가에 앉아 사람들에게 기대할 있는 것은 그들의 동정심과 동전 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혼을 그의 빛으로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어떤 어둠의 요소도 남김 없이 치료하시고 그의 빛과 생명으로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만큼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어둠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어둠의 문제들을 예수님의 빛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힘과 위로가 되시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자식처럼 (실제로 자식이지만) 돌보시고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힘써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은 끝이 없으며 능력은 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털끝만큼의 어둠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전체가 되신 하나님을 믿고 주님께 드려지는 감사와 기도이어야 합니다.

 

바디매오의 소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자 바로 그의 눈이 떠져 보게 되었습니다. 눈을 바디매오는, “가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자기 길을 가는 대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에게 눈을 뜨는 것보다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길을 따르며, 예수님을 배우며,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눈을 떴다 말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결코 나는 부자야!” 하며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가난하다고 생각하며, 재산을 모으기를 원합니다. 항상 돈에 울고 웃는 삶을 삽니다. 돈이 그에게 빛이고 그림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발버둥을 침으로써 많은 부를 쌓아갑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가난합니다. 부자이지만 항상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삶도 비슷하다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재산입니다. 그는 믿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마음으로 더욱 간절히 예수님을 찾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마음에 평강이 임하기까지 간절히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뜻에 순종하며, 밝은 믿음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가난합니다. 그렇게 가난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주님을 좇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립보서 3:13-14). 같은 장의 15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믿음의 동역자들을 가리켜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12절에서는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감당해야 믿음의 숙제를 주십니다. 그리고 숙제의 목표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 가난한 부자 매일을 사는 것입니다.

 

고상한 사람은 가장 귀한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비록 그것을 아직 손에 넣지 못했더라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끊임없이 빛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소망이 있으며, 소망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반대로 가장 귀한 대신 번째로 귀한 추구하는 사람은 천박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얻었더라도 그는 여전히 천박합니다. 언젠가 그가 얻은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종말에 어둠 속에 거하게 됩니다. 실상 가장 귀한 예수님 빼고 번째로 귀한 세상에 없습니다. 뿐입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우리 믿는 자의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소경이며 거지이지만, 예수님을 믿어 빛을 보았고, 예수님을 따름으로 고상한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소경이라도 보는 자이며, 가난해도 부자이며, 비천해도 고상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세상의 존귀함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낮은 자리로 돌아가야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복되고 고상한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은혜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