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에 이르는 길
마가복음 10:32-45
“Comfort Zon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안전 지대”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Comfort Zone은 마음이 평안함을 느끼는 공간이나 상태를 말합니다. 불확실성, 위험, 결핍 등으로부터 오는 불안이나 스트레스가 없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적, 정신적, 영적 자원들을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Comfort Zone에 있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상태를 원하고, 이를 끊임없이 추구하여 나아가며, 크든 작든 그런 삶의 공간을 갖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가정(Home)”이 있고,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서로 교제를 나누는 교회도 이런 Comfort Zone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Comfort Zone과 비교되는 지대들도 있습니다. “Optimal Performance Zone (최적 수행 지대)”은 Comfort Zone과 달리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으며, 이 스트레스가 그 사람을 자극하여 일을 하고 성과를 내게 하는 장소나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학교나 회사가 그런 곳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의 삶은 Comfort Zone과 Optimal Performance Zone을 오가면서 쉬고 일하는 일상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Danger Zone (위험 지대)”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는 불확실성, 위험, 결핍 등으로부터 오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정상적인 생활이나 일을 할 수 없는 장소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런 상태를 싫어하며 피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받아들여야 할 때 슬프고 낙담이 됩니다.
어떤 상태가 Comfort Zone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과 더스틴 호프만(Dustin Hoffman)이 주연한 빠삐용(Papillon)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스티브 맥퀸이 연기한 “빠삐용”과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드가”라는 사람입니다. 이 둘은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인데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다 잡힌 끝에 결국 “악마의 섬 (Devil’s Island)”이라는 외딴 섬에 갇히게 됩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이들은 농사도 짓고, 돼지도 키우고, 랍스터도 먹으면서 죄수 치고는 비교적 풍요롭고 자유롭게 삽니다. 드가는 이 섬에서의 생활을 편안하게 생각하며 이곳에 정착합니다. 드가에게는 악마의 섬이 Comfort Zone인 것입니다. 하지만 빠삐용은 늘 “더 큰 자유”를 그리워하며 바다 건너 저편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로 뛰어들어 조그만 뗏목을 의지한 채 자유를 향한 여행을 시작합니다. 섬에 홀로 남은 드가는 절벽 위에 서서 멀어져가는 빠삐용을 바라보면서 “웃는 듯 우는 듯”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을 짓습니다. 하지만 손바닥만한 뗏목을 타고 위험한 항해를 시작한 빠삐용의 표정에서는 일말의 불안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자유를 찾은 사람처럼 행복하고 평안합니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Comfort Zone을 향해 가고 있으며, 가장 위험한 바다라도 그의 항해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32절 앞부분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위협을 느끼고, 그들의 예수님께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예수님을 고소할 근거를 얻고자 사람들을 갈릴리 지방에 파견하여 예수님을 감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종교지도자들과의 충돌을 피하시기 위해서 더 북쪽의 이방인 지역으로 다니시면서 사람들을 섬기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고자 혈안이 된 원수들이 들끓는 위험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제자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조그만 개척교회를 열고 주위 사람들을 섬기며 평화로운 삶을 살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누가복음 9:51절에서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정한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여정의 중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에 서서” 가시고, 제자들은 뒤에 따라가면서 “놀라고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담대하심과 제자들의 주저하는 마음 상태를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가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이 말씀으로 마가복음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며 부활하실 것을 세 번째로 예고하신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마가복음 8:31절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시자 베드로는 몹시 흥분해서 예수님을 붙들고 말렸습니다. 두 번째로 9:31절에 예수님께서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자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다시 고난과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후,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구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구하는 것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에 대해서 들었을 때, 그것은 말 그대로 “절망”이었습니다. 입에 담기도, 마음으로 생각하기도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제자들의 마음 속에 “영광의 소망”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냥 죽으러 가시는 길이 아니고, 영광을 얻기 위해 가시는 길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주님과 함께 누리고 싶은 소원이 생겼으며, 이를 예수님께 구하게 되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야고보와 요한의 소원이었습니다. 41절에 따르면, 이를 듣고 예수님의 다른 열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히 여겼다고 합니다. 이는 야고보와 요한 뿐 아니라 다른 열 제자들도 마음에 같은 소원을 갖고 있으며, 이를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 생각에 우리 크리스천이 상상하고 소망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Comfort Zone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영광에 다다르며, 그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그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가 돌아갈 집이며, 우리가 영원히 거할 완전한 Comfort Zone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유대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위험한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어머니의 품 같이 포근하고 정든 갈릴리 고향 땅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대한 결심을 하신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당하실 일은 제자들을 심히 놀라고 두렵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영광의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예루살렘이나 갈릴리 고향 땅이나 똑 같이 “죽음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나 죽으나 예수님을 따를 수 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8-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니라.” 바울의 소망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소망에 이르기 위해서 항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며 행합니다. 죽는 것이나 사는 것이나 그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면 기쁘게 그 길을 걷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의 끝에 주님께서 그 영광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소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야고보와 요한은 일 초도 쉬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과 예수님께서 받는 “세례”란 무엇일까요? 세례란 “죽음”을 말하며,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 그들이 먼저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고난과 죽음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죽음을 겪지 않고서는 결코 영광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 고난과 죽음을 거쳐야 할까요? 우리는 자주 고난과 죽음을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내리는 형벌”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는 이것이 완전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2:17절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시장 바닥이 된 것을 보시고 분노하신 예수님은 상을 뒤엎고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이를 본 제자들이 시편 69:9절 말씀을 기억한 것입니다. 시편 69: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이 말씀은 왜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을 피하실 수 없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심이 너무 크고 강해서 그 열심이 마치 뜨거운 불처럼 예수님 자신을 태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께서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며, 또한 우리 신자들의 삶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열방의 선지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1:4). 그런데 예레미야가 나가서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예레미야 20:8b). 하지만 예레미야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불평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가 밖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집에 앉아서 입을 닫고 있으면, 그 마음 속이 불에 타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이래저래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냥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고난을 겪는 선지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악마의 섬에 갇힌 빠삐용은 친구 드가처럼 그곳을 “내 집”으로 여기며, 농사도 짓고 돼지도 키우고 낚시도 하면서 나름대로 안락한 삶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은 늘 “자유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이 불이 너무 뜨거워서 그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그에게는 맛있는 바닷가재 요리도 전혀 맛있지 않았고, 섬의 아름다운 경치도 전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섬에 있는 자체가 고통이며 고난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이 섬에 대해서는 죽어 있었습니다. 이 섬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애착도 없었습니다. 빠삐용은 늘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연구했습니다. 섬을 둘러싼 사나운 파도와 상어떼는 공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빠삐용이 자세히 내려다보니 이 바다가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생명의 바다”였습니다. 그는 이 바닷물이 흘러서 자신을 섬 밖의 자유로운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친구 드가가 보기에 빠삐용은 “죽음”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빠삐용은 “이미” 섬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섬에 사는 동안 그는 늘 “자유에 대한 열정”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바다에 뛰어들어 파도와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빠삐용은 실상 고통과 죽음을 벗어나 그가 그토록 그리던 Comfort Zone을 향해 가장 기쁘고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예수님께서 켜 놓으신 불이 있습니다. 이 불은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입니다. 이 불이 밝고 뜨거울수록 이 땅에서의 삶은 고난입니다. 이전에 내 집처럼 즐기던 Comfort Zone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세상에서 “나그네”가 됩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향해서 계속 움직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고난과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장차 누릴 영광에 대해서 비교하는 구절들이 여럿 있습니다. 로마서 8: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또 고린도후서 4: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사도 베드로 또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베드로전서 5:10). 이 말씀들에 따르면 고난은 “잠간” 받는 것이며, 반면에 영광은 영원합니다. 또 장차 받을 영광에 비해, 우리가 현재 받는 고난은 가벼운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영광을 가리켜 “지극히 크고 중한 것”이라고 부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케 되며, 굳세게 되며, 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더욱 강하고 순수하게 만드는 “불”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으며 여러가지 고난들을 겪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살던 시절을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평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 (민수기 11:5).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영광의 약속이 “수박 한 통”이나 “고등어 한 마리”의 무게만도 못하게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떠나온 애굽 땅이 Comfort Zone이었습니다. “영광”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무게” 또는 “덩어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의 시간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재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 이 영광은 자신의 생명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다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고난의 잔을 마시고 죽음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Comfort Zone은 하늘에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계시고, 거기에 우리의 생명이 있으며, 거기에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그 영광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무겁고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고난을 통해서 측정하십니다. 이 소망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을 내린 것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6:19). 이것이야말로 우리 믿는 자들이 세상을 살면서 Comfort Zone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확실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속에 불로 임하시고, 이 확실한 영광으로의 길을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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