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부자와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10:23-3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1. 16. 05:21

부자와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10:23-31 

딸이 대학교를 다닐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치료 물질을 개발하는 연구실이었는데, 실험을 위해 사용하는 암세포가 있었습니다. 암세포는 오래 전에 어떤 암환자가 기증한 것인데 (HeLa cells은 아니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 구입한), 적합한 환경을 유지하고 영양분을 공급해주면 죽지 않고 계속 번식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험을 위해서 암세포 덩어리에서 조금씩 떼어내어 사용하지만, 덩어리는 줄지 않고 계속 원래의 크기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딸을 만날 때마다 암세포는 있니?” 하고 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암세포도 살아있는 세포이지만 정상 세포들에 비해 가지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암세포는 무한히 번식합니다. 정상 세포는 분열을 하다가 자신이 소속된 기관이 정해진 크기에 이르면 성장을 멈춥니다. 하지만 암세포는 크기의 한도 없이 계속 번식하며 비대해집니다. 둘째로 정상 세포는 몸의 특정 장소에 정착하지만, 암세포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몸으로 전이됩니다. 셋째로 정상 세포는 예를 들어 간세포나 폐세포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특정 기능을 수행하지만, 암세포는 몸을 위해 특별히 수행하는 기능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무위도식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정상 세포는 손상되거나 노화되어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없게 되었을 치료되거나 다른 세포로 대치되지만, 암세포는 치료되지도 폐기되지도 않고 계속 생존합니다. 다섯째로 정상 세포는 다른 세포들과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상호작용을 하지만 암세포는 이런 상호작용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합니다. 이런 암세포의 특징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너무나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에는 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죄의 본질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피할 있는지에 대해서 중요한 교훈들을 배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전에 공부했던 마가복음 10:17-22 말씀에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하셨습니다. 말을 들은 사람은 슬픈 기색을 하고 근심을 하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말을 들은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는 제자들의 가슴에 아예 못을 박아버리셨습니다. “얘들아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말했습니다.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있는가?” 제자들의 반응은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사실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부자이기는 커녕 끼니때마다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었으며,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도 그들은 가난한 갈릴리 어부들에 불과했습니다. 가난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옳다구나! 부자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하며 기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있겠습니까?” 하며 황당하다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랬을까요? 모르긴 해도 부자가 되는 이들의 장래 소망들 하나였을 것입니다. 28절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의 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 19:27). 그의 말대로 베드로는 배와 그물과 잡은 물고기 모든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누가복음 5:11).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고자 기대했습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던 숨은 소망이었습니다. 앞서 부자는 많은 재물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재물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행동은 반대라고 있지만, 마음 속에 숨은 동기(motive) 같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부자 청년에게나 가난한 제자들에게나 똑같이 슬프고 근심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관한 여러 경계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6:24 말씀이 있습니다. “ 사람이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누가복음 12:1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사도 바울 또한 이렇게 경계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렇게 경계의 말씀이 많고 간절한 것은 그만큼 돈의 유혹과 돈에 대한 사람들의 욕심이 강함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많이 소유하고 많이 소비함으로써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Erich Fromm이라는 철학자가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의 삶은 크게 가지 모드(mode) 나뉩니다. 하나는 소유(Having)”이며 다른 하나는 존재(Being)”입니다. 그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가지 예로 배우는 학생 듭니다. “소유 모드 학생에게는 자신의 지식을 쌓는 배움의 목표입니다. 그는 시간 수업에 들어가 배운 것들을 노트에 정리하고 암기하고 시험을 봐서 A학점을 받고 이런 과정을 계속해서 졸업장과 학위를 받습니다. 소유 모드의 학생은 지식을 쌓기는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움을 통해 얻은 학위와 졸업장을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소유한 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해하며 이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존재 모드 학생에게 배움은 어떤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이 관심을 갖고 탐구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고,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일을 하여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며, 배운 지식을 생각하고 소화하고 이용하고 창의하여 지식으로 나아갑니다. 존재 모드의 학생에게 지식이란 자신이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 또는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입니다. 소유 모드의 학생은 학점과 학위와 졸업장 소유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주어지지 않는 배움은 그에게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존재 모드의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배움이라면 이런 증서들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환영합니다. 이것은 재물 관련해서 더욱 분명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돈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많은 돈을 소유하는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소유 모드의 학생이 필요와 상관이 없이 지식을 쌓고 학위와 졸업장을 모으는 것과 같이, 소유 모드의 사람들은 그냥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자체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그는 돈을 벌기 전에 나는 돈이 필요한가?”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돈을 벌고 나서도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것인가?” 대해서 깊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냥 금고에 많은 돈이 쌓여있는 것으로써 그는 이미 성공했다고 믿으며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걸린 것과 같습니다. 소유의 욕심은 족함을 모르고 끝없이 성장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하며, 결국 사람을 죽게 만듭니다.

 

Erich Fromm 성경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인도하시는 방식들 하나가 바로 소유 모드의 사람을 소유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새로운 존재 되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1-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먼저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의 근원 되기 위해서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본토 친척 아비 떠나는,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과 흡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29-3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먼저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라 하십니다. 여기서 버린다 말을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떠난다 (leave)”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신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그들에게 지금까지 인생의 목적은 소유였습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삶의 목적이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위하여 , 그들이 포기했던 모든 것들을 배나 얻게 되며, 무엇보다도 내세에 영생을 받게 것이라고 하십니다.

 

존재 모드의 학생은 지식을 배우는 뚜렷한 목적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벌어 사용할 뚜렷한 목적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살아가는 뚜렷한 목적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삶의 자산들 나의 시간, 지식, , 에너지 등을 목적을 이루는데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적은 내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되며, 내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위해 정하신 자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너희가 말을 듣고 언약을 지키면 너희가 열국 중에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하십니다 (출애굽기 19:5-6).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인도하신 목적입니다. 뚜렷한 목적이 없는 삶은 마치 암세포 같습니다. 정상 세포에게는 그것이 수행해야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능이란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전체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포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리고 기능을 수행할 없게 되면 세포로서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잃게 되며, 따라서 다른 세포에게 자리를 양보합니다. 하지만 암세포는 전체를 이롭게 하는 그런 기능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나와 가족과 소유 있을 뿐입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많은 것을 소유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평안히 지내며 필요한 것들과 원하는 것들을 마음껏 그리고 오랫동안 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우리 성도들에게는 땅에서의 시간이 다할 때까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붙들어야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을 섬기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며, 인생의 목적을 섬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며, 복을 받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자로서 먼저 자가 많으니라.” 제자들은 과연 모든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마치 봄날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어린 같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볕을 쬐면서, 속의 물과 양분을 흡수하면서 힘있고 싱싱하게 자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마음 속에 세상 욕심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예전처럼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발걸음도 무거워졌습니다. 어린 싹처럼 푸르고 싱싱하고 부드럽던 마음이 점차 딱딱하고 억세고 불평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즐거움은 사라지고, 입을 내밀고 주님 우리가 무엇을 얻을 있을까요?” 하며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포기했던 옛날의 삶을 다시 그리워하게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자로서 나중이 위험에 빠져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여러 동안 쌓인 경험을 가리켜 연륜이라고 하며, 그런 연륜을 가진 사람을 존경합니다. “연륜(annual ring)” 문자적인 의미는 매년 나무가 성장하면서 안에 생기는 나이테 말합니다. 돌처럼 단단하지만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고목이 되어 썩어지고 쓰러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연륜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어린 싹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즐거워하는 살아있는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가리켜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하고 우리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린도후서 4:16) 합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 합니다 (빌립보서 3:13-14). 그는 마치 매일을 생애의 첫날인 것처럼 모든 것을 버리며 마음으로 예수님을 좇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 자로서 먼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마음에 원하는 대로 소비할 행복할 있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행복은 존재에서 오는 것입니다. 많은 재물을 가졌다는 것은 마치 커다란 암덩어리 몸에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몸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몸이 아닙니다. 심지어 나의 건강을 해치고 얽매이게 하며 결국은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사람의 행복은 내가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어떤 존재인가그리고 내가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해 무슨 선한 일을 하는가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 우리의 영혼에 어떤 질병도, 어떤 딱딱함도 생기지 않으며, 자유롭고, 새롭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있는 것입니다. 매일을 처럼 푸르고 아름답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의 비밀을 깨닫고, 매일을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살며, 가볍고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천국을 향한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감당할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