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 (사무엘하 24:1-25)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1. 9. 14:04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

 

사무엘하 24:1-25

 

사무엘상/하서는 전체적으로 다윗왕의 전기라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서들은 대부분 죽음의 소식으로 시작됩니다. 여호수아서는 여호와의 모세가 죽은 …...” (여호수아 1:1),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 (사사기 1:1), 사무엘하는 사울의 죽은 후라 ……” (사무엘하 1:1), 그리고 열왕기하는 아합이 죽은 후에 ……” (열왕기하 1:1) 시작합니다. 사무엘상의 시작도 제사장 엘리의 죽음으로 구시대의 종말과 새시대의 시작을 알리며, 열왕기상 또한 다윗 왕의 퇴장과 새로운 솔로몬의 등장이 오버랩 되면서 시작됩니다. 오늘 공부할 사무엘하의 마지막 장인 24장의 이야기는 실질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다윗왕의 생애에서의 마지막 에피소드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이제 떠나는 왕에게 그렇게 명예롭거나 영광스럽지가 않습니다. 노년의 다윗왕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벌을 받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목동 다윗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 다윗이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한 일만큼이나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언제나 그러하듯,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드러나시기 때문입니다. 전에 사무엘상 30장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다윗을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 같다고 적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범죄한 다윗에게 가지 하나를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왕의 땅에 년의 기근이 있을 ,” “왕이 대적에게 쫓겨 달을 도망할 ,” “그리고 왕의 땅에 동안 온역이 있을 입니다. 이에 다윗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다윗은 그가 지은 죄로 벌을 피할 없게 상황에서도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고 진노하신 하나님 손에 빠지기를 원합니다. 이는 그에게 믿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는 긍휼이 크신 하나님입니다. 믿음이야말로 다윗이 다윗의 삶을 있게 가장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30:5절에서 시인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 노여움은 잠깐이요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다윗이 이렇게 노래한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말씀에,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다시라는 말을 것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갖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다 노래합니다 (출애굽기 34:6, 시편 86:15, 시편 145: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진노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의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끊임 없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의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사람들의 죄의 본성이 완고한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없습니다. 시편 51:3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대저 나는 죄과를 아오니 죄가 항상 앞에 있나이다.”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잠깐 실수하여 죄를 지었다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뜻밖에도 그는 죄를 타고 났으며 심지어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조차 죄악되었습니다. 죄가 그를 떠나지 않고 평생 그리고 항상 그의 앞에 있습니다. 그런 그가 동시에평생 그리고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며 행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랐습니다. 언젠가 신앙 선배가 이런 말을 적이 있습니다. “‘야말로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가지 반증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실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보면, 하나님 앞에서 뜻을 거스르는 죄인이란 존재할 없습니다. 권한이 제한적인 인간 왕들에서조차 이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헤롯 대왕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그의 사랑하는 아내 마리암과 그로부터 낳은 아들을 죽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동방 박사들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 지경에 있는 이하 사내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이렇듯, 절대 권력자 앞에서 그의 뜻을 거스르고 분노하게 하는 죄인이란 전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매우 예외적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화나게 합니다. 그것도 가끔 실수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 반복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부지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며 존귀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죄인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인간이 누리는 특권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반증이 됩니다.

 

사람이 죄인이면도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에서 살아남을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1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이에 그들을 치시려고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습니다. 다만 다윗의 나올 뿐입니다. 이는 그가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 수를 조사한 것입니다. 10절에 다윗은 인구 조사를 마친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내가 일을 행함으로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그런데, 1절에 따르면,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게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미련한 일을 하고 죄를 짓게 하셨을까요? 이는 아마도 다윗의 숨은 ,” 그리고 이스라엘의 숨의 드러내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군대장관 요압을 명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가운데를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숫자를 내게 알게 하라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을 기뻐하지 않는 요압과 군대장관들을 재촉하여 인구 조사를 강행했습니다. 9절에 인구 조사를 끝낸 요압이 왕에게 보고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 만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 만이었습니다. 이를 , 인구 조사의 목적은 아마도 전쟁에 나가 싸울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군인이었습니다. 역대상 28:3절에,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하기를 원하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다윗은 일생을 전쟁터에서 싸우며 많은 피를 흘린 군인이었지만, 그는 많은 싸움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역시 다윗의 말년을 기록한 사무엘하 22:1절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다윗은 이렇게 찬송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무엘하 22:2-4). 다윗의 찬송시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구원이시며, 그의 병기이시며, 그의 승리가 되십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그에게 평안을 주신 지금 다윗은 전쟁에 나가 싸울만한 사람들의 수를 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 보이지 않고 다윗왕 보였을 것입니다. 다윗왕의 통치 아래서 누리는 평화와 번영으로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하나님 나라 즐겼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든 죄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처음 만난 것은 광야에서였습니다. 예레미야 2:2-3절에 하나님께서는 때의 만남을 이렇게 추억하십니다.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소년 때의 우의와 결혼 때의 사랑 씨뿌리지 못하는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때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성물 나의 소산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 사랑입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척박한 , 사나운 짐승들과 원수들이 우글거리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할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연약함과 불신으로 많은 훈련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양이 목자를 따르듯 하나님께 달라붙어서 밤낮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밖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알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름진 땅에 살면서,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신가?” 하며 찾지 않고, 다스리는 자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관리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좇았습니다 (예레미야 2:7-8). 하나님께서는 광야 때의 사랑을 소년 때의 우의 결혼 때의 사랑으로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때를 그리워하시며, 백성들이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새 물고기를 마리도 잡지 못한 그에게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하시자,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예수님 무릎 아래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떠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를 제자로 부르시고 자신을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베드로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주님의 구원하심과 부르심 아니라 자신의 충성심이며,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의 함께함과 보호가 필요하신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막고, 심지어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실 때도 칼을 빼들어 싸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이런 충성심 뒤에는 자기의 자기 사랑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을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처음 만났던 곳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를 베드로야!”라고 부르시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 그는 시몬이었으며 그는 죄인으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었습니다. 그런 시몬을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 부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둘은 사랑 시작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때의 사랑을 기억하시고, 때를 그리워하시면서, 베드로가 때의 사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2-3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시는 편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편지의 수신처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교회에 대해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촛대를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4-5). 예수님의 책망은 매우 엄중합니다. 그리고 책망의 이유는 그들이 처음 사랑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 그들이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거짓 사도들의 거짓을 드러낸 것을, 그리고 참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2:2-3). 하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잘못은 모든 잘함으로도 덮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처음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기억하기를 간곡히 권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유대인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에베소서 2:11-13). 이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소망 없는 이방인으로 때에 그들을 부르시고 구원하신 예수님과 나눴던 첫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을 기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항상 거기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도 항상 있습니다. 다윗이 그의 말년에 지은 어리석은 죄는 사람의 죄의 본성이 완고하고 사라지지 않으며, 심지어, 자주 악화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 또한 그가 말년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16). 우리는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가 함께 없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여 스스로 자기 의를 쌓든지, 아니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하나님을 잊고 살든지 해야 같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어느 쪽도 해결책이 아닙니다. 죄악된 사람이, 그의 있는 그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서 평화롭고 즐겁게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전혀 소망 없는 죄인임을 발견할 때만, 그리고 나의 생명과 행복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깨달을 때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을 가늠할 있으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는 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한 죄인으로서, 구주를 처음 만나 주님을 향해 가졌던 처음 사랑이 그만큼 특별한 것입니다.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나의 의로움이며, 나의 생명이며, 나의 평화이며, 나의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윗이)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지금 우리는, 우리의 완고한 죄와 연약함을 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로 갑니다. 거기서 우리는 자신이 소망 없는 죄인임을 보며, 동시에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영광스러운 소망과 함께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변함없이 자비로운 음성을 듣게 됩니다. 우리의 죄가 끝나지 않는 것처럼 주님의 긍휼도 결코 끝나지 않으며, 심지어 더욱더 커져갑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긍휼하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었을 , 흉악한 죄인 되었을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나누었던 처음 사랑으로 매일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