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누가복음 2:1-14)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12. 26. 05:27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

 

누가복음 2:1-14

 

크리스천의 삶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명이 있을 있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기억하고 감사하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거룩한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믿는 자들의 삶에서 있는 가지 특징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것들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우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첫째로, 사람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임하시고, 동행하시며, 역사하시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님의 능력의 역사가 드러나는 삶이라고 있습니다. 둘째로, 크리스천의 삶은 이웃들에 대한 사랑의 수고로 채워지는 삶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동력은 이상 욕심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리스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유일한 참소망으로 인해 모든 현재의 고난들을 참고 견디며 이겨내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생각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삶의 세번째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마디로 말해서 기다리는 입니다. 그가 기다리는 소망은 절대로 그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소망의 성취는 우리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기쁨 됩니다. 누가복음 2장에도 기다리는 사람들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25-26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 그는 그리스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원자를 기다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 보았을 그는 아기를 안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는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음이니이다” (누가복음 2:29-30).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그의 소망이 이루어졌습니다. “기다림 끝났습니다. 그의 마음에 평안이 임했습니다.

 

2:1절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때에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호적하라 하였으니 ……”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40년간 로마 제국을 통치하였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8 뜻하는 “August” 그의 이름에서 왔습니다. 그는 로마를 통한 세계 평화(Pax Romana)” 주창하며, 정복 전쟁을 통해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며, 이런 지방들과 로마를 연결하는 많은 도로들을 건설하고, 세금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호적 명령또한 효율적인 세금 징수가 그것의 가장 목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구스도 존엄자또는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라는 뜻을 가진 타이틀로서, 황제를 거의 신적인 구원자 높이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식민지 백성들에게 그는 고통을 안겨주는 압제자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호적 명령에 따라 하던 일을 멈추고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또한 그들이 살던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다윗의 동네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여행( 150km 또는 94마일) 해야 했습니다. 이는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37절에 보면 호적할 때에갈릴리 사람 유다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당시 사람들이 로마의 압제 아래서 겪는 고통이 어떠했는지를 대충 짐작할 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 황제의 영광 실상 사람들의 그늘입니다. 그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흑암 중에 고통해야 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올라갈 때는 마리아가 잉태하여 만삭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길고 위험한 여행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때가 되어 마리아가 아기를 해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머무를 곳이 없어서 아기를 구유에 뉘었습니다. “아기 예수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이시며, 세상을 다스리러 오신 왕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대접 받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며,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의 부모는 식민지 백성이며 갈릴리 시골 사람으로, 태어난 아기를 위해 여관방 하나도 마련할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참으로 건조하고 무덤덤하게 아기의 탄생을 기록했습니다.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세상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생각하면, 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이것이야말로 구주께서 땅에 오시는 가장 합당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세상이 흑암중에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절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하며, 1:11절은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 합니다. 요한의 증거를 거꾸로 말하자면, “어두움은 깨닫지 못하지만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비취고 있으며, 자기 백성들은 영접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주께서 자기 땅에 오신 입니다. 오롯이 주님만이 빛이시며, 오롯이 주님만이 구원이십니다. 세상의 아무 것도, 세상의 어느 누구도 주님께 빛이 없으며 구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장 낮은 ,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 아기로 내려오셔서, 이제 세상을 빛으로 비추시고 구원하실 준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은 빛과 생명 결정체이십니다. 세상에는 보배를 담을 그릇이 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구유에 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 지경의 들판에서 목자들이 밤에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그들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무서워하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말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하는 소식은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리켜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천사가 설명하는 복음은 절대적으로 좋은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백성에게 미치는 좋은 소식이며, 동시에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소식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나에게 좋은 소식이 이웃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 있습니다. 심지어 나에게 좋은 소식이 이웃에게는 나쁜 소식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말하기를 백성에게 미칠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만히 보니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오직 그들만을 위한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하심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우주적인(Universal)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며,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들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 문둥병자와 귀신 들린 자와 같은 더러운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몹시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들만을 위한 구원자가 아니라 백성에게 미치는 좋은 소식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쁨의 좋은 소식 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내게 가장 기쁨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그를 마음으로 기뻐하는 자에게만 기쁨 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선하심은 지극히 개인적인 (Personal)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메시아를 통해서 다윗왕 시대의 부와 권세 회복하고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로마 제국의 가이사 아구스도와 같은 유대 아구스도 기다렸던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시고, 사람들에게 자꾸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기뻐하라,”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께 순종하라고만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 전혀 없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과 주님의 가르치심이 그들의 기쁨이 되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께서 거하실 자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앞에서 그들의 마음 속에 숨겨진 죄가 드러나고,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싫어하고 미워하는 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아기 예수님께서 수없이 많은 좋은 방들을 버려두고 마구간의 구유에 누이셨는지, 그리고 천사가 다른 많은 존귀한사람들을 버려두고 밤에 들에서 양을 지키는 목자들에게 나타나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탄생은 백성에게 미치는 기쁨의 좋은 소식 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사랑과 진리로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시며, 우리를 하나님 안에 있는 빛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업적은 평화입니다. 그의 이전에 거의 200년의 기나긴 시간 동안 로마 제국은 안팎으로 끊이지 않는 갈등과 전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그의 탁월한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지도력을 통해서 이런 분쟁들을 종식시키고 평화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거짓이 가져온 평화이며, 오히려 영혼들의 고통하는 소리를 억누르고 핍박하는 평화입니다. 세상은 평화롭지만, 개개인의 사람들은 내면에 하나님 없는 지옥의 괴로움 안고 숨죽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약속은 거창하고 장황하지만, 거짓되고 공허할 뿐이며 고통하는 영혼들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거짓 평화 깨뜨리시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며, 우리에게 평화 주십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심과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은 매우 진실되고, 친밀하며, 섬세하며, 지혜롭고, 온유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구원하심과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은 우리를 모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도합니다. 주님의 구원하심과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은 마치 맑은 물이나 정결한 빵과 같아서, 우리가 주저함이 없이 마음껏 즐거이 먹고 마실 있습니다. “그리스도 주의 탄생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함이 없는 생명의 양식 주신 것입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하였습니다. “그리스도 태어나신 아기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였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이것이 표적(sign)”이라고 합니다. 언젠가 담임 목사를 청빙하기 위한 인터뷰 모임에서 후보자에게 이런 질문을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무엇을 통해서 당신이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알아볼 있겠습니까?” 질문을 통해서 제가 듣고 싶었던 것은 그가 목회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질문을 잘못 이해하였는지 그는 목회자 칼라 (Clerical Collar)”라고 대답했습

니다. 그의 대답대로라면, 구주요 그리스도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화려한 비단옷과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표적으로 가지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구주 되신 표적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신 이었습니다. 아마도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는 마구간이나 구유만큼 친숙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소와 양과 나귀의 배설물들로 인해 더럽고 냄새나는 이곳이 목자들에게는 오히려 향기롭고 편안한 보금자리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구주께서 그곳에 누워 계신 것입니다.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목욕을 하거나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모습 그대로, 냄새가 나는 옷을 입은 곧바로 예수님께 달려갈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주 되신 표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겸손입니다. “낮아지심입니다. “우리와 같이 되심입니다. 아무런 표적이 없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표적입니다. 누구와도 구별되시지 않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부유하고, 지혜롭고, 높아지고자 경쟁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은 모두 비슷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려고 애를 쓰십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시며, 문둥병자의 몸을 만지시며, 이방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과부의 고통을 위로하시며, 우리 육신의 약함을 체휼하십니다. 구주 되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시는 표적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낮아지셔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같아지신 것입니다. 주님의 표적은 겸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두려움 없이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며 주님의 구원하심과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받을 있습니다.

 

13-14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영광이란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들 말합니다. 예수님은 안에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들 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전에 제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는 선배에게 적지 않은 금액을 빌려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성경을 가르쳐준 성경 선생이었습니다. 메일을 보내고 선배의 답장을 기다리면서 저는 매우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우선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얘기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선배에게 곤란한 부탁을 것이 죄송했습니다. 다른 편으로, 선배가 부탁을 거절하면 어쩌나 몹시 조바심이 났습니다. 다시 메일을 보내서 부탁을 취소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밤새 뒤척이며 고민하다가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열었습니다. 선배가 보낸 답장 메일이 와있었습니다. 메일의 제목은 글자였습니다. “즉시!” 제목을 보는 순간 저를 무겁게 짓누르던 불안함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리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임했습니다. 메일을 열어보니, 선배는 외국 땅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저를 위로하고 칭찬하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적은 이니 갚지 않아도 된다며, 오히려 저를 돕는 것은 자신의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메일의 내용을 읽지 않더라도, “즉시라는 제목만 보고도 저는 이미 선배의 마음을 충분히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싫음도, 아까움도 없었습니다. 오직 빨리 어려움에 빠진 후배를 돕고 싶은 간절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랑의 편지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의 제목은 즉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선물을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선물을 받을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던 모든 불안함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리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임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라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기다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어야만 합니다. 소망이야말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담고 섬길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자리 남겨놓고 가셨습니다. 그것은 소망이며, “영원한 소망입니다. 우리가 세상 소망에 울고 웃는 자가 아니요, 비이고 가난한 마음으로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다리는 참된 소망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