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한 아기 (이사야 9:1-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12. 20. 04:22

아기

 

이사야 9:1-7

 

성경에서 사람들은 자주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 1:24, 마태복음 26:71). 이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렛은 이스라엘 지파 스불론 (Zebulun) 지파에게 배분된 땅에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단순히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모두가 같은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유대인들은 따로 ()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같은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개인의 출신지 이름이나 (예를 들어, 가룟 유다, 아리마대 요셉) 사람의 아버지 이름을 (예를 들어, 요한의 아들 시몬,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함께 사용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기본적으로 나사렛 사람 예수 의미합니다. 이름은 예수님을 조롱할 부르는 이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갈릴리 지방과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유대인들 중에서 멸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6절에,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이 나사렛 사람 예수님을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 소개하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있느냐?” 심지어 나다나엘은 갈릴리의 다른 마을인 가나 (Cana) 출신(요한복음 21:2)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사람들조차도 볼일 없는 마을 취급하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예수님을 애써 무시하기 위해서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름을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용합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주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베드로는 성전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걸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러자 그가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도행전 3:6-7). 베드로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모여있는 이방인들을 향해 이렇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사도행전 10:38). 전에 예수님을 멸시하기 위해 쓰였던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이 이제는 제자들에게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소리 높여 찬송하고 증거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땅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갈릴리 땅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스라엘 땅은 크게 지역으로 나누는데 남쪽의 유대 지방(Judea) 중부의 사마리아(Samaria) 그리고 북부의 갈릴리(Galilee)입니다. 중에서 남쪽의 유대 지방은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유대인의 전통을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지켜온 가장 순수한 유대 국가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의 민족적 자부심도 매우 강했습니다. 반면에 북쪽에 위치한 갈리리 지방은 외세의 칩입도 자주 받고 이방의 문화에 많이 노출되어 있어서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적 순수성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1절에서도 갈릴리를 가리켜 이방의 갈릴리(Galilee of the Gentiles)”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아예 이스라엘의 일부로 인정해주지도 않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9:11절에 보면, 솔로몬 왕이 두로 히람에게 갈릴리 지방의 성읍 20개를 넘겨줍니다. 이는 히람이 솔로몬 궁과 성전을 지을 재료들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로왕 히람은 성읍들을 보고는 이런 땅을 주는 거야!” 하고 불평합니다. 땅에 대한 애착이 몹시나 강했던 고대의 왕들조차 이렇게 값싸게 취급했던 것을 보면 갈릴리 땅이 얼마나 멸시를 받았는지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있겠습니다. 예수님 시절에도 갈릴리 땅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요한복음 7:52) 하고,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요한복음 7:41) 하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사야의 말씀에는 빛과 어둠이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갈릴리 땅은 이전에 흑암 중에 있었는데, 땅에 빛이 비추었습니다. 이전에 땅은 고통하며, 멸시를 당하며, 사망의 그늘 아래 거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땅이 빛으로 인해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갈릴리 지방의 역사에 대해 소상히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사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어둠속에 있으며, 어둠을 밝히는 빛을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사람들의 삶이란 모두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동안 혼자 아이들을 돌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매우 힘든 시기였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위해 끼니 음식을 만들고, 등하교 길에 차를 태워주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일을 하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공부와 숙제를 도와주며, 함께 한국 비디오를 보거나 책방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상담을 하기도 하고, 잠자리에 때면 침대 머리에 앉아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성년이 되었지만 이들은 자주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 장면들이 마치 선명한 사진처럼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는 아빠가 그들에게 했던 말들과 그들을 위해 했던 일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지만, 시간이 어두웠던 만큼 아빠와 함께 했던 좋은 기억들이 더욱 선명하게 그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려움은 잊어버리고 즐거움으로, 자랑으로 날을 회상합니다. 사실 이것은 아이들의 이야기일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가 모든 것을 잃고 깊은 어둠에 갇혀 있을 ,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구원이 네게 부족하냐? 내가 너와 함께 있는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 저는 비로소 하나님이 인생의 유일한 빛이 되심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흑암 같은 삶을 빛으로 채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우리 각자의 삶이 마치 네거티브 필름 (negative film)” 비추어 장의 사진 만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생 자체는 네거티브입니다. 거기에는 빛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어두움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곳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일 , 우리 인생이 아름답게 변합니다. 감추어졌던 색들이 예쁘게 빛깔을 드러내며, 가장 어둡던 곳은 오히려 가장 환하게 빛을 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일을 하실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지 않은 인생은 아무리 빛을 찾아 애를 써도 여전히 네거티브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빛과 생명을 누릴 있는 세상 모든 영혼들에게,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삶은 자체로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며 흑암 속을 행하는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삶을 빛과 생명으로 아름답게 채우시며 영화롭게 하십니다.

 

3-5 말씀은 하나님께서 흑암 중에 고통하던 백성들에게 가져다주시는 즐거움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3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 즐거움은 추수하는 즐거움이며,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즐거움은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는 즐거움입니다. 성경에서 우리 개인의 삶은 여러가지 비유로 설명됩니다. 그중 하나는 씨를 뿌리고 열매를 수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수와 싸워서 이기고 살아남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4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무겁게 멍에와 어깨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the day of Midian’s defeat) 같이 하셨다 합니다. 여기서 미디안의 이란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 기드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7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그리고는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메뚜기 떼와 같이 무수한 미디안 군대를 멸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처음 기드온을 찾아왔을 그는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사사기 6:11). 당시 미디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름 내내 농사를 지어놓으면 추수 때에 쳐들어와서 모든 곡물들을 쓸어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움푹 패인 포도주 틀에 숨어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 고생하면서 키운 농작물을 거두자마자 원수들에게 빼앗긴다면 그것만큼 슬프고 절망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사람들을 기드온의 손에 붙이시고 오히려 그가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많은 탈취물들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수들을 두려워하며 몰래 농사를 짓고 타작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면서 일을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가지 삶을 있습니다. 하나는 원수 앞에서 두려움으로 사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5절은 “(예수께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평생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귀의 종이 되어 살다가 결국은 생명을 죽음에 빼앗겨버립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여름내 초조함 가운데 많은 고생을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빼앗겨버리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즐거움 주십니다. 그것은추수하는 즐거움이며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헛된 수고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손으로 수고한 것을 축복하시며, 그것을 원수로부터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일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방 땅에 살면서 많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그의 많은 재산 오히려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 믿고 사는 것이 매우 무모하고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축복이 되시며 아브라함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이상 생존을 위해군인의 갑옷을 입거나 흘리는 싸움을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즐거움(joy)” 평강 (peace)”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나의 방패가 되시며 나의 지극히 상급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6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되었는데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것임이니라.” 앞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빛을 보며, 고통하던 자들에게 즐거움이 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약속이 어떻게 성취됩니까? 그것은 아기 통해서입니다. 아기가 우리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기는 바로 우리 가운데 아들로 태어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아들은 아기 불과하지만 우리가 상상할 없이 놀라운 이름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 믿음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 내가 가진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기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아기는 입니다. 작고 연약하지만 안에는 무한한 신비와 가능성이 숨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아기의 몸으로 땅에 태어나셨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세상 사람들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모든 축복들을 안에 담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축복을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마태복음 9장에 소경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소리쳤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붙들고 물으십니다. “내가 능히 일을 줄을 믿느냐?”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들은 비록 눈이 멀었지만, 믿음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실 있는지를 보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하신 모든 약속들을 오직 아기 예수님 통해서만 이루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일은 예수님을 깊이 알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안에 예수님께서 크신 분으로 자라시는 것이 바로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전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예수님의 이름은 기묘자(Wonder)”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하는 놀랍고 신기한 비밀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이름은 사사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가 하나님의 천사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하고 물었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신 이름이기도 합니다. 천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이름은 기묘니라” (사사기 13:17-18).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기묘자이십니다. 얼마 전에 NASA에서 제임스 우주 망원경(James Webb Space Telescope)이라는 우주 망원경을 발사하여 운영중이라고 합니다. 망원경은 기존의 우주 망원경인 허블 우주 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 없는 깊은 우주를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성능 우주 망원경으로도 우주의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우주의 깊은 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많은 은하들을 관측할 뿐입니다. 여전히 우주는 기묘 남아있습니다. 끝을 없는 어둠 속에 자신의 모습을 감춘 , 수없이 많은 빛들을 우리에게 비추어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 가장 밝은 계시가 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은 기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다함이 없이예수님께 대해서 배우고, 생각하고, 공부할 있으며, 매일 새로운 예수님 만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기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18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다음과 같은 권고의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사람들이 지식 갖게 되는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귀납적 (inductive)”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연역적 (deductive)” 방법입니다. 귀납적 방법은 보고 관찰하고 경험한 사실들을 근거로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라도 없음이니이다” (요한복음 3:2).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분은 하나님께로 오신 분이시구나하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를 귀납법이라고 합니다. 연역법은 반대로 지식으로부터 개별적인 사실들을 유추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로마 백부장은 자신의 병든 하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인을 고치시기 위해 그의 집에 가시려고 하자 백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태복음 8:8). 로마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감히 자신의 누추한 집에 모실 없는 한없이 귀하고 높으신 이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불치병을 고치실 있는 전능하신 이셨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그의 속에는 예수님께 대한 놀라운 지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놀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우리는 백부장이 어떻게 예수님께 대한 이런 지식과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정확히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크신 예수님께서 그의 삶을 다스리시고 축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예수님의 이름은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기묘자요, 모사(모든 것을 아시며 지혜로우신 선생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며,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비록 아기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사실은 세상 만물과 우리 인생들을 품에 안고 다스리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십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빛을 비추셔서 예수님의 크고 높으심을 깨닫게 하시는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지식이야말로 우리를 빛과 생명과 영광으로 이끄는 우리의 소중한 영적 재산이 됩니다. 억만금과도 바꿀 없는 보배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은 검고 칙칙한 네거티브 필름과 같습니다. 하지만 안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담을 , 우리 삶은 한없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빛을 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축복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