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
이사야 8:1-22
유다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 성을 치기 위해서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손을 잡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다 왕 아하스와 백성들은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듯이 심하게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 왕에게 보내셔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하나님께서는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심히 노할지라도 그들은 타다가 꺼져 연기만 나는 부지깽이에 불과하며 그들의 악한 꾀가 이루어지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7:1-7).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 아하스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도록 도우시기 위해서 그가 원하는 대로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대신 강대국 앗수르의 왕 디글렛 빌레셀을 믿었습니다. 아하스는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며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올라와서 나를 구원하소서!” (열왕기하 16:7-8). 하나님께서는 그의 도우심을 거절하며 대신 앗수르 왕에게 엎드려 손을 내미는 아하스 왕을 징계하셔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에게 “징조”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징조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 하나님께서 주신 이 징조의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시고 이 땅에 태어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사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삶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하신지를 보여주는 많은 말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또 요한복음 5:1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시는 “말”과 “일”이 모두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요 그의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을 비우시고 그 안을 아버지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무능력자”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와 사랑으로 채워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닮기를, 곧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사람들도 같은 소원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갖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처럼 높아지며 그 권세와 영광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람들은 자주 “스스로” 곧 하나님을 떠나서 홀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며, 대신 스스로 하나님이 되며,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실상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그 안을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심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그 안을 하나님으로 가득 채움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믿음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8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마누엘이여” 하며 어떤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는 지금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비결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을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며, 우리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5-6a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일러 가라사대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서로 대조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이며 다른 하나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입니다. “실로아 물”이란 예루살렘 성문 밖에 있는 기혼 샘(Gihon Spring)에서 솟아나서 성 내의 실로암 못(Pool of Shiloam)으로 흐르는 물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도시들이 큰 강을 끼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예루살렘 성은 시온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어서 그와 같은 강이 없습니다. 기혼 샘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성 주민들의 유일한 물 근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물을 가리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이라고 하십니다. 이 물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십니다. 그런데 그 공급하심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과 같습니다. 넘치지 않으며 매일 그날 하루 쓸 만큼 솟아나서 천천히 흐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했다”고 하십니다. 르신은 아람 왕이며, 르말리야의 아들이란 북이스라엘의 왕 베가를 말합니다. 아람의 수도는 “다메섹(오늘날의 다마스커스)”인데, 열왕기하 5:12절에 따르면,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의 문둥병을 낫기 위해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선지자 엘리사에 말을 듣고 이에 분노하며 이렇게 불평합니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아람의 강들은 훨씬 크고 넓으며 물이 풍부했던 것 같습니다. 큰 강을 끼고 번성한 도시 다메섹 또한 모든 것이 풍요롭고 거리마다 진기하고 흥미로운 일들로 넘쳐났을 것입니다. 열왕기하 16장에 따르면, 유다 왕 아하스가 앗수르 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앗수르 왕이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취하고, 사람들을 사로잡아가고, 또 아람 왕 르신을 죽였습니다. 이에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렛 빌레셀을 만나기 위해서 다메섹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아하스는 다메섹 사람들이 그들의 신에게 제사하는 “제단(altar)”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에 홀딱 반했습니다. 아하스는 그 제단의 식양을 그려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에게 보내 그대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성전에 있던 “놋단(bronze altar)”를 옆으로 치우고, 그 자리에 이 새로 만든 단을 놓았습니다. 열왕기하 16:15절에서는 이 단을 가리켜 “큰 단”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원래 있던 놋단에 비해 크고 화려했던 것 같습니다. 아하스 왕은 놋단을 버리지 않고 “오직 놋단은 나의 물을 일에 쓰게 하라”며 남겨두었습니다. 아람 왕 르신은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왕 아하스는 그 땅의 크고 화려한 제단을 부러워하며, 이것을 가져다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전을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놋단은 “나의 물을 일” 곧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때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만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이제 아하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필요할 때만 찾는 “용한 점쟁이”이 불과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다메섹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에 그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늘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떠나서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만나를 내려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꼭 하루 먹을 만큼 식량을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신명기 8: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이 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들어가 얻으려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애굽 땅)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 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신명기 11:10-15). 애굽 땅에는 큰 강이 있어서 씨를 뿌린 후에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물을 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는 그런 강이 없습니다. 그 대신 이 땅은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땅”입니다. 여호와께서 “적당한 때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백성들은 씨를 뿌리고 스스로 물을 대는 대신, 씨를 뿌리고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말 주시고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며, 그들의 행복의 근원이 되심을 사람들이 알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솟아나는 물 근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과 같이 신실하신 은혜의 하나님을 싫어하고, 대신 화려하고 풍요롭고 즐거워 보이는 다메섹의 이방 문화를 기뻐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의 군대를 보내셔서 유다의 온 땅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들의 기쁨이 그들의 근심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대신, 세상을 기뻐할 때 그 기쁨은 곧 변하여 우리의 근심이 되고 재난이 됩니다. 세상의 기쁨은 일시적이며, 거짓됩니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우리 영혼 속에 스며들어 우리의 생명을 소생시키고, 더러운 것을 씻어내며, 깊은 만족을 줍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쁨은 음료로 마실 수 없는 것이며, 우리 영혼을 더럽히고 병들게 하며, 더 깊은 목마름에 시달리게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으며, 우리 또한 하나님의 빛과 생명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져 어둠 가운데 방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과 거룩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욕심” 대신 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이 우리에게 더할 수 없이 귀하고 귀한 생명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금식하시고 시장하신 중에도 돌을 떡으로 만드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셨습니다. 마귀가 보여주는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얻기 위해서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시는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 고난의 잔을 드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생명이시며 기쁨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유일한 소망을 하나님을 기뻐하며,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채우시기 위해 겸손하고 온유하고 잔잔하게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표이시기도 합니다. 우리 속에는 세상에 대한 욕심이 있으며, 그래서 늘 세상에 매이고 또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늘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길을 살피고 따라가며, 그들의 지혜를 배웁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8:12-14a). 또 말씀하십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8:19-21a).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우리를 생명길로 인도하십니다. 세상은 풍요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지식과 지혜와 정보가 넘쳐나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이는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갈릴리 시골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셔서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습니다. 이 샘물은 생명의 물이며, 기쁨의 물이며, 지혜의 물입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게 깊은 곳에서 흐르는 이 물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디서 그 권능과 지혜를 얻으셨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로 하나님과 은밀하게 연결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실로 내 영혼 속에 내주하시며,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는 축복이 우리 각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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