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다윗과 요압 (사무엘하 18:1-15; 19:1-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11. 28. 05:08

다윗과 요압

 

사무엘하 18:1-15; 19:1-8

 

제가 자주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비밀이고, 죄는 나와 사단 마귀 사이의 비밀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종류의 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수도 없고 수도 없는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영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빛과 생명으로 인도되기도 하며, 어둠과 죽음으로 인도되기도 합니다. 영적인 삶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삶이거나, 사단 마귀와 함께 하는 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이에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사무엘 상하서의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사무엘상에서의 다윗은 비록 사울왕에게 쫓기는 도망자로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그는 믿음의 영웅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께 묻고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하나님을 통해서 했습니다. 사무엘하에서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하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다윗은 오히려 견딜 없이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 성경 본문은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다윗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반역을 하고 부자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전히 아들 압살롬을 사랑하고 그의 안위를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은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하라는 다윗의 부탁을 무시하고 그를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다윗은 아들을 위해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마음 놓고 통곡하며 아들의 죽음을 애도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오늘 설교 말씀에서 저는 다윗과 그의 군대 장관인 요압의 관계를 통해서 이런 다윗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무엘상에서의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믿음을 살았다면, 사무엘하에서의 다윗은 하나님보다도 사람 요압 의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이 다윗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겠지만 일이 그렇게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그것의 결국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압은 다윗의 군대 장관입니다 (사무엘하 8:16). 오늘날로 치면 국방부 장관 비슷한 지위지만, 전쟁이 빈번했던 다윗 시대에 군대 장관은 왕의 다음가는 “2인자로서의 권세를 누렸으며 심지어는 왕보다 권세를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요압은 다윗과 친족 관계에 있었습니다. 요압은 자주 스루야의 아들 소개되는데, 스루야는 요압의 어머니이며 다윗에게는 누나가 됩니다 (역대상 2:16). 그러니 요압은 다윗의 조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버지는 이새 반면, 사무엘하 17:25절에 따르면, 누이 스루야의 아버지는 나하스라는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요압은 비록 친족 사이이기는 하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같습니다. 요압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사무엘하 2장으로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후입니다. 요압이 어떻게 다윗의 군장이 되었는지는 성경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역대상 11:6절에 따르면, 다윗은 당시 여브스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을 공격할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여브스 사람을 치는 자는 두목과 장관을 삼으리라.” 그러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먼저 올라가서 두목이 되었으며, 다윗은 그를 군대장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사무엘하 8:16). 비록 다윗이 유다 족속의 왕이었지만 군대를 통솔하는 실질적인 권력은 요압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의사와 상관 없이 북이스라엘의 군장인 아브넬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다윗의 의사에 반하여 화친을 청하러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사무엘하 3:39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악한대로 갚으실지로다!”

 

이와 같이 요압은 다윗에게 양날의 검과 같았습니다. 그는 유능한 군인으로서 다윗 왕국의 존속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왕인 다윗조차 제어하기 어려운 권력자이며 야심가였습니다. 이런 요압을 군대장관으로 다윗은 속으로 탄식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요압과 은밀한 거래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신복들 하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한 다윗이 그녀와 간음을 죄를 감추기 위해서 요압과 비밀리 협력하여 우리아를 죽게 것입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충성스러운 신하였으며, 밧세바는 다윗이 탐내서는 안될 다른 사람의 아내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넘었습니다. 그리고 선을 넘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요압과 공모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서 요압에게 비밀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다윗이 보낸 편지를 요압은 당연히 분노하며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의 동료 군사인 우리아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압은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왕의 명령대로 행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다윗에게 보내어 전황 보고를 하게 하고 이와 함께 우리아가 죽었다는 반가운 소식 전하도록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아의 죽음은 비록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쟁터에서 흔히 일어날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일이 우리아를 없애기 위해 다윗과 요압이 함께 꾸민 일임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압 덕분에 다윗은 정말 완벽하게 우리아를 없애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차지할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선을 넘어 원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이 악한 여기는 요압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다윗은 요압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우리아를 죽이라는 자신의 명령을 요압이 즉시 그리고 은밀히 수행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의 도움을 받아서 다윗은 쉽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차지하였습니다.

 

일이 있은 다윗과 요압의 관계는 매우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러운 비밀 공유하고 있는 사이가 것입니다. 다윗은 무력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요 목자로 높이신 것입니다. 다윗의 왕으로서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다윗이 제어하기 어려운 요압을 그의 아래 두고 신하로 있는 것도 오직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 아니라 요압의 사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요압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이스라엘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주인의 처들을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처를 빼앗아 처를 삼았도다” (사무엘하 12:7b-9).  다윗이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을 하나님께서는 모든 원수들을 그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를 넘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게다가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주었으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다함이 없는 축복의 근원 되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나아가 구할 ,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그에게 주신 것들을 잊으시고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앞에 나아오는 자에게 너는 충분히 받았으니 그만 !”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충만입니다.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 위에 은혜 베푸십니다 (요한복음 1:16). 다윗은, 심지어 그것이 악한 소원일지라도, 그의 모든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는 대신, 요압에게 들고 갔습니다. 다윗은 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왕의 권위를 포기하고 요압에게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요압은 아주 기꺼이 다윗의 요청을 다윗이 원하는 방식대로 들어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요압이 신하로서 왕의 명령에 복종 것으로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이것이 결코 사실이 아님을 있습니다. 다윗은 비록 아들 압살롬이 그를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아가는 군장들에게 특별히 부탁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사무엘하 18:5). 다윗의 간절한 부탁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며, 아무도 왕의 뜻을 거역하고 압살롬의 몸에 손을 생각은 꿈에서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압살롬을 죽인다는 것은 다윗왕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요압은 달랐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왕의 뜻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나무에 걸려 꼼짝할 없게 것을 알았을 ,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달려가 창으로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요압의 마음 속에 다윗왕이라는 존재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에게 압살롬은 다윗왕의 사랑하는 아들 아니라 반역자이며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정치적 라이벌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심지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왕을 협박하면서, 그가 슬픈 기색을 거두고 백성들 앞에 나아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뻐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요압에게 다윗왕은 영혼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는 다윗과 요압이 죄의 비밀 나눈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요압의 협조는 다윗에게 매우 달콤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윗은 아들의 죽음조차 막을 없는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대신, 죄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압이 악한 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도 측근이라고 있는 수제자 베드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호언했습니다 (누가복음 22:33). 그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말리며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베드로를 기특하게 여기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칭찬하시는 대신 호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기 전날밤 체포당하실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기를 군인들과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끌고가려고 하자 베드로는 자신이 갖고 있던 칼로 대제사장의 하인을 쳐서 그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칼을 빼어든 베드로를 칭찬하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타이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베드로는 참으로 충성된 제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항상실패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사람의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순종하여 마셨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측근이라도,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헌신하고자 하실 , 베드로의 가장 충성스러운 헌신도 사단 마귀의 훼방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점에서 순간도 양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다른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셨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시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6:15). 하지만 예수님께는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임금 되셨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진정한 세상의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는 은밀한 비밀 나누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하나님보다 가까운 사람 영적으로 유익함보다 해로움이 훨씬 많습니다.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먹고 하나님께서 범죄하였습니다. 창세기 3:6절에는 여자가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합니다. 아담은 자신이 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아내가 주는 실과를 어떻게 거절할 있겠습니까?” 하고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십니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 (창세기 3:17). 그렇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의 아내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착한 남편이라고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을 책망하십니다. 비록 같은 아내일지라도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는 끼어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 심지어 아내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도, 아내의 말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대면해야 하며,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며,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구해야 합니다. 이로 인해 오해와 핍박을 당할지라도, 일이 더디고 어려울지라도, 손해를 보고 실패를 경험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의 길을 아시며,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참으로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며,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축복하실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비밀이고, 죄는 나와 사단 마귀 사이의 비밀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오직 하나님과만 나누는 신기한 비밀들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부자입니다. 그리고 사단 마귀와는 아무런 은밀한 비밀도 나누지 않습니다. 그는 죄를 지어도 하나님 앞에서 짓고, 하나님의 징계와 꾸지람을 받으며,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결코 사단 마귀에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4).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6).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17-18).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살며,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나눌 , 우리 영혼이 풍요롭고, 자유롭고, 건강해집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된 평화와 기쁨과 능력이 우리 안에 임합니다. 우리 각자가 은혜를 알고 누리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