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부르라 여호와를 찾으라
이사야 55:1-13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의 첫날을 예배로 시작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새해는 모든 일이 형통해야 할텐데 …”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우리는 조심스럽게 새해의 문턱을 넘습니다. 정말 새해에는 모든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축복된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우리의 “복된 삶”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복”에 관하여 제가 참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34:8-10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고 있으면 참으로 마음이 든든합니다. 특히 처음 말씀이 그렇게 스윗할 수가 없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는 삶입니다. 이 복을 누리는 자는 누구입니까? “여호와께로 피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입니다. 우리 속담에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자가 그것을 더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25:29). 새해를 시작하는 지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물과 포도주와 젖은 “생명과 기쁨과 풍요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생명과 기쁨과 풍요함”으로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이 은혜가 간절히 필요한 “목마른” 자들이지만, 동시에 “돈 없는” 가난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이를 사 먹으라고 하십니다. 원하는 만큼 마음껏 즐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와는 달리, 세상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생명과 기쁨과 풍요함”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또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많은 소중한 것들을 희생합니다. 하지만 많은 수고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혼을 살리고 배부르게 할 것들을 전혀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늘 목마르고, 굶주리며, 궁핍합니다. 정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며 “한강에 돌 던지기”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은 아마도 창세기 3:17-19절 말씀일 것입니다. 이는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세상에서 사람들은 일생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무성한 황무지에서 땀을 흘리고 고생하면서 하루 하루를 겨우 연명하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청종하라!” 원어 성경에는 “들으라! 나를 들으라! (Listen, listen to me)” 하시며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또 3절에서도 계속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세상과는 달리 하나님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생명과 기쁨과 풍요함”을 누립니다. 그리고 이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언약”이며 “확실한 은혜”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믿는 것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변함없이 확실한 은혜를 내 삶 속에 고스란히 받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삶”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선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늘 이런 하나님께 나아가 그 뜻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정하신 뜻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모든 대적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확실한 은혜”에서 “확실한”이란 말의 원어가 우리가 기도를 끝맺으면서 붙이는 그 “아멘”입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는 “아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모든 축복의 말씀에 대해서 내가 “아멘” 하고 믿을 때, 그 축복의 말씀이 곧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됩니다. 내가 계속 “아멘” 하는 이상,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바꾸시는 법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책임지시고, 내 삶에 개입하시게 됩니다. 이는 내 삶이 더 이상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만민에게 증거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아멘” 하고 받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여정은 언약의 말씀으로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과, “아멘”하는 믿음으로 그 말씀을 붙드는 내가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이런 내 삶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증거됩니다. 그리고 이런 내 삶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사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 만큼이나 “확실한 은혜”입니다.
6-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이며, 내가 불의한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가까이 계시며, 우리가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사야 65:2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종일 손을 펴서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십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까이 계실 때”는 언제를 말할까요? 그것은 “오늘”입니다. 그 때는 “지금”입니다. 이스라엘의 “패역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종일 손을 펴서 그들을 부르시는데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살륙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 (이사야 65:12). 이들은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은혜의 때”를 놓치고 큰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길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길 사이에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걷는 길”과 매일 “하는 생각”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오래 다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동안, 곧 “은혜의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그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길을 걷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해야 할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내일을 기다리지 말고 오늘 해야 합니다. 내년을 기다리지 말고 올해 반드시 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의 때”이며, 복을 받을 때입니다.
8-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의 길이 우리의 길과 다르다고 하십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배우고 따라야 할 “목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 하나님을 대신할 스승이나 목자가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킴으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시편 119:99-100).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지혜와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지식들을 다 모아놓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길과 생각을 묵상하면 세상의 모든 스승들을 뛰어넘는 지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란 무엇일까요? 지혜란 쉽게 말해서 “화를 피하고 복을 얻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를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그 지혜를 구하지 않고, “욕심을 따라 세상에서” 그 지혜를 구합니다. 디모데후서 4:3-4절 말씀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런 사람에게 “지혜”란 자신의 욕심을 채워줄 것 같은 거짓되고 헛된 약속으로 자신의 가려운 귀를 시원하게 긁어주는 말들입니다. 이것은 지혜가 아니며 오히려 “화”를 부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서는 결코 “복”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축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리” 곧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길, 나의 생각과 전혀 다를지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눈에 그 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보일지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우리가 발견하고 마음으로 품게 됩니다. “높다”는 것은 “값지다,” “고상하다,” “귀하다,” “중요하다” 등의 형용사들을 한 마디로 함축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높은 길과 생각”은 그야말로 우리 성도들이 목숨을 걸고라도 획득해야 할 가장 귀하고 값지고 고상한 “복”이며 “보배”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갖게 되면 참으로 하늘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입니다.
10-1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고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저는 자주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받을 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꽤 직관적입니다. 깊이 생각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건강, 성공, 재물 등이 세상에서의 복의 기본적인 요소들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농부는 가을 추수를 통해서, 어부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통해서, 회사는 전년보다 높아진 매출과 이익을 통해 “복 받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의 성공과 행복을 통해서, 병약한 사람은 몸의 건강을 통해서, 무직자는 취업을 통해서 “복 받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자들이 “성도”로서 기대하는 “복”이 무엇일까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세상에 보내셔서 이루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 “나의 뜻”과 “나의 명하여 보낸 일”이 무엇일까요? 제가 믿기에 이것은 우리 개개인의 “영적 성장”입니다. 갈라디아서 4:19절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위해 간절히 바라고 수고하는 것은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곧 성도들 자신이 예수님을 닮도록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처럼 거룩해지며, 하나님 아버지처럼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뜻” 또는 “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은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은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해야 할 은혜는 하나님께서 내게 대해 그 원하시는 바를 마음대로 행하시며,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그 원하시는 바를 온전히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이시며,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경작하시는 “밭”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밭에 씨를 뿌리시고, 물을 내리시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우리의 영적 성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고 복을 받으십니다. 우리 삶의 열매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복을 비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은혜의 세계”로 초대하십니다. 이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는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가까이 계시며 우리가 지금 돌이켜 하나님을 찾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높은 길과 생각을 배우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닮은 자녀들로 성장하며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내 삶 속에 이루어질 때, 우리가 그 열매로 하나님을 축복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서 이사야 55장 말씀을 한해동안 무시로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