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므나의 비유
누가복음 19:11-27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열 므나의 비유”입니다.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주님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일을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22; 9:43-45; 13:33; 18:31-34).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는 달랐습니다. 11절에 말씀하기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통해서 회복되는 메시아 왕국이었습니다. 메시아의 인도 하에 압제자들을 쫓아내고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강한 나라, 부유한 나라, 안전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이들의 꿈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로 그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 그들이 대망하던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온 백성들의 눈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기대와 소망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 곧 “열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세상에 임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나”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세상에 임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옛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실 때, 먼저 모세를 통해 그 백성들을 준비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이시기 전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시면서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예비하셨습니다. 아무리 약속의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이라고 하더라도 그 땅에 사는 사람들 속에 천국이 없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의 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많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속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나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다른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내 은행 통장에, 내 곳간에, 내 일터에, 내 자녀의 성적표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모두 “하나님 나라”를 얘기하며 소망하지만, 이렇게 예수님과 내가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다릅니다. 이것이 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 므나의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 그는 종 열 명을 불러서 그들에게 각각 한 므나의 돈을 나누어.주고 자신이 돌아오기까지 장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는 종들을 불러 그들이 어떻게 장사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주인을 그를 칭찬하면서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종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므나를 그냥 수건에 싸두고 장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긴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주인은 그를 책망하면서 그가 갖고 있던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종에게 주도록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 이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종들에게 주신 “므나”와 그것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므나”는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의 중량을 세는 단위입니다. 23절에 주인이 악한 종을 꾸짖으며 “어찌하여 내 은(silver)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한 것을 보면, 여기서 므나는 은의 무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은 한 므나”의 가치는 100 데나리온이며 이는 노동자의 3개월치 품삯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 므나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여러 다른 해석들이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혹자는 하나님께서 개인들에게 주신 “은사나 재능들”이라고 하고, 혹자는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해석들로도 우리는 이 비유로부터 충분히 의미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므나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또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권세 (Power)”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왕이 되어 돌아온 귀인은 장사를 잘 하여 다섯 배, 열 배의 이문을 남긴 종들을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했다”고 칭찬하면서 그들에게 각각 “다섯 고을의 권세 (authority),” “열 고을의 권세”를 줍니다. 즉 더 큰 권세를 준 것입니다. 이에 비추어보면, 귀인이 종들에게 애초에 주었던 “작은 것” 곧 “한 므나”는 “작은 권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비유에서는 이 귀인의 “왕 됨”을 강조합니다. 왕이란 가장 높은 권세를 가진 자이며,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주는 것은 “일(사명)”과 그 일을 할 수 있는 “권세(권한)”입니다. 어떤 자들은 이 귀인을 미워하고 그의 왕 됨을 원치 않았습니다 (14). 비유의 마지막에, 왕이 되어 돌아온 귀인이 명하기를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고 합니다. 왕에게 있어서 가장 악한 원수들은 그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만약 귀인이 그들에게 어떤 “권세”를 주었다면, 이들은 비웃으면서 말할 것입니다. “아니 당신이 뭐 왕이라도 되는 거야? 나한테 이런 것을 주다니.” 또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맡긴다면 이렇게 따질 것입니다. “내가 왜 당신 말을 듣고 이 일을 해야 하는데? 당신이 내 왕이야?” 그렇습니다. 오직 귀인을 “장차 다시 올 왕”으로 인정하는 자들만이 그의 권세에 순종하며, 또 그가 준 권세를 믿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받는 자의 “믿음과 순종”이 중요하지만 그의 믿음과 순종 자체가 “므나”인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께로부터 “권세”가 그에게 내려오고 또 그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그 권세가 그 안에서 살아 역사하며 생산적인 일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므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는 “권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귀인이 종들을 불러서 “므나”를 준 것처럼, 권세는 “왕”으로부터 나오며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아래로 흐릅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하늘에서 포도주를 비같이 내리게 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그 능력을 믿는 자들을 통해 흘러내리게 하시며 결국 그 능력이 역사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이에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항아리를 아구까지 가득 채웠습니다.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하인들은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물이 어느새 최상급 포도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능력이 바로 역사하지 않고, 믿는 마리아를 통해, 그리고 마리아가 준비시킨 바 순종하는 종들을 통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항아리에 담긴 물에까지 이르러 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가장 높은 왕의 권세가 계단식 폭포(cascade)처럼 믿음의 사람들을 타고 흘러 내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이적을 행한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성전 문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를 본 베드로가 그를 불렀습니다. “우리를 보라!” 그리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러자 이 사람이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걷고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베드로는 돈에 관한 한 이 앉은뱅이 걸인만큼이나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것, 곧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므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입니다. 이 앉은뱅이에게 일어난 치료의 기적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리고 곧 이 놀라운 능력의 비밀 “곧 예수님의 권세”를 증거했습니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3:16). 그렇습니다.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입니다. 이 이름이 그를 낫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 이름의 권세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성전 앞에서 담대히 그 이름을 드러내고, 앉은뱅이를 도와서 그로 하여금 그 이름을 믿고 그 이름으로 나음을 입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권세가 이 불쌍한 앉은뱅이 걸인에게도 전해지고 그 또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귀인이 준 한 므나로 장사를 하여 열 므나를 남긴 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6). 이 말에 대해 우리는 이 종은 “장사 수완”이 좋아서 혹은 열심히 일을 해서 한 므나를 투자해서 많은 이윤을 남겼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주여 주의 한 므나가 열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입니다. 이 구절을 NKJV나 NIV영어 성경은 “Master, your mina has earned ten more,” 곧 “주여 주의 한 므나가 열 므나를 벌었나이다” 라고 번역하고 ESV 성경은 “Master, your mina has made ten more” 곧 “주여 주의 한 므나가 열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열 므나를 벌어들인 것은 “종의 공로”가 아니라 귀인에 종에게 준 “므나” 자체입니다. 곧 므나 자체에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생명력과 생산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5:26-27절에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씨가 스스로 자라는 것처럼, 므나도 스스로 이윤을 남깁니다. 종이 할 일은 그냥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말씀에서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경건함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인합니다. 이 불쌍한 사람을 낫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한 것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 이름의 권세입니다. 베드로에게 칭찬받을 공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이름”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믿도록 도운 것입니다. 이는 마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뿌려진 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것은 그 씨 안에 있는 능력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믿고 농부는 담대히 그리고 열심히 씨를 뿌립니다. 이는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고 씨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착하고 충성된 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귀인으로부터 받은 “므나”의 권세, 귀인의 권세, 곧 왕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속에 이 권세가 역사하도록 열심히 일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이윤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한 므나가 열 므나를 만든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한 므나로 많은 이윤을 남긴 것과는 반대로, 한 종은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이 사람은 주인이 준 므나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가 이렇게 한 이유로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고 변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를 “악한 종”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의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이 종을 가리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부릅니다. 곧 이 종의 악함은 그의 “게으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면서, 게으름을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주인이 무서운 사람”이라면서 주인 탓을 한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두려움 문제”에 대해서 관대한 편입니다. 왜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을까요? 물론 두려워할만한 무섭고 위험한 대상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그런 “무섭고 위험한 대상”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평생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종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자주 “두려움”을 “게으름”의 문제로 봅니다. 그 한 예가 오늘 본문의 비유입니다. 또 잠언 22:13절은 말씀하기를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 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합니다. 비슷한 말씀으로 잠언 26:13절은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합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자주 자신의 “게으름”을 감추기 위해서 “두려움”을 말합니다. 곧 “악하고 게으른 종”은 두려움을 핑계로 주인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를 싫어했던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곧 “착하고 충성된 종”은 모든 두려운 일들을 마다하고 열심히 일합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절에는 사도 바울이 교회들을 섬기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겪었던 어려운 일들을 아주 길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중 일부를 인용하자면: “......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11:26-27). 그는 이 모든 위험들을 그의 주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주님의 교회들을 위해 감당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울을 두렵게 할 수 없었으며, 교회를 위한 그의 열심을 약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요한1서 4:18절은 말씀하기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두려움을 이깁니다. 하지만 게으른 자는 두려워합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주인이 엄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형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신자의 삶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곧 그것의 시작과 과정과 끝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단계는 왕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므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므나 즉 권세를 주심으로 비로소 우리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므나를 늘리는 장사에 헌신하는 것이 우리 삶의 과정입니다. 므나를 늘린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세 곧 그의 다스림을 확장시킴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우리는 이 므나를 왕께 들고 나가 정산을 받습니다. 믿는 자는 예수님의 왕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를 부르시고 그에게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신적 권세를 주십니다.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왕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친구 속에 자신을 복제(replicate)하는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그의 왕으로 영접하고 또 그 왕으로부터 므나를 받도록 돕는 것입니다. 곧 왕의 다스림을 받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친구 속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므나는 항상 우리에게 명하기를 “예수님은 왕이십니다”라고 외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를 듣고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착하고 충성된 마음을 주셔서 우리 왕 되신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이웃들을 도와 그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영접하고 믿고 순종케 하는 장사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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