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라 (누가복음 18:1-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5. 3. 21. 23:0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라

 

누가복음 18:1-8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본문 1절에는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나아가 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비유의 다른 목적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소망 중에 기도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면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선하게 해결해 주실 것을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크리스천하면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과부의 기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일반적인 기도와는 결이 다릅니다. 그녀의 기도는 끈질긴 기도(persistent prayer)”라고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반드시해결해야 가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있는 능력이나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녀의 삶이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재판관에게 가서 간청합니다. 그것이 그녀가 있는 유일한 이며, 그녀가 문제를 해결할 있는 유일한 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녀가 자주그에게 갔다고 말합니다. 그녀에게는 문제보다 다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었던 같습니다. 그래서 밤낮 일에 대해 생각하고 기도하고 행동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와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성경에 끈질긴 기도 하는 다른 인물들이 나옵니다. 하나는 우리 구주 예수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원수 사단 마귀입니다. 히브리서 7:25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서서 기도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2:10절에서는 사단 마귀를 가리켜.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라고 합니다. 마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성도들의 허물을 고발하고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합니다. 저는 과부의 기도가 예수님의 항상 하시는 중보 기도와, 그리고 사단 마귀의 밤낮 없는 참소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과부는 고아 나그네와  함께 약하고 가난한 자의 상징처럼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호의를 보이십니다. 시편 68:5절에서 시편 기자는 말씀하기를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하시며, 신명기 27:19절에서 모세는 명하기를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는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누가복음 20:47절에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한다 하십니다. 말씀에 비추어보면 당시 과부들은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며 부당한 일을 많이 당한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우리가 일관되게 목격할 있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과부도 그랬습니다. 어떤 도시에 과부가 있는데 그녀는 도시에 재판관에게 자주 찾아가서 간청했습니다. “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이야기에는 과부의 원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완고함을 생각하면 그녀가 갖고 있는 원한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있습니다. 그녀의 간절함 좋은 대비를 이루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판관의 무관심입니다. 도시에 재판관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었습니다. 앞에 인용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이런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과부의 억울한 사정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재판관이었지만 정의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하십니다 (6). 없는 과부는 원수로부터 불의한 일을 당했으며, 그녀의 원한을 풀어줄 재판관 또한 불의합니다. 그녀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라!”

 

과부가 그랬습니다. 그녀는 불의한 재판관을 자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재판관은 처음에는 그녀의 청원을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과부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와 호소하자 재판관은 마침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여자의 간절함이 재판관의 불의한 무관심을 이겼습니다. 그를 움직였습니다. 과부가 있는 유일한 것은 소망 중에 기도하는 이었습니다. 불의한 원수들과 권세자들에 둘러싸여 있을 그녀가 있는 일은 절망 중에 세상을 원망하면서 홀로 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마음 속의 소망의 불을 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재판관에게 갔습니다.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계속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재판관을 움직였습니다. 그로 하여금 자신의 원한을 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원한을 풀게 것은 재판관의 권세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과부의 끈질긴 기도였습니다. 그녀의 기도가 재판관의 권세보다 강력했습니다. 그녀는 기도로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이는 그녀의 기도가 간절하고 강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녀의 기도를 이길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녀의 기도는 재판관을 이기고, 원수를 이기고, 모든 역경들을 이겼습니다.

 

누가복음 17:11-19절에 문둥병자 명이 소리 높여 부르짖기를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문둥병을 고쳐주시고, 명이 돌아와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마가복음 5:25-34절에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그녀의 병이 나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마가복음 10:46-52절에 여리고 성의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치자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띠우시면 말씀하십니다. “가라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문둥병자, 혈루증을 앓던 여자,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모두 맺힌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병은 아무도 낫게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절망 불평밖에 다른 것이 있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주저앉아 슬퍼 울면서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가 소망 중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세가 그들을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믿음 그들을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예수님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권세가 간절한 기도 굴복하고 순종한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나는 과부와 같이 간절히 풀어야 원한이 없다 생각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과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과부라는 사실을 생각할 그녀가 갖고 있는 원한이 남편 관련된 문제일 있다고 짐작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이룰 남편을 주셨는데 지금 그녀는 몸의 절반 남편을 잃고 오직 나머지 반쪽으로 불완전하고 결핍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단 마귀의 꾀임에 빠져 죄를 짓고 이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남편 없는 과부나, 부모 없는 고아나, 없어 방황하는 나그네와도 비교할 없이 비참하고 절망스러운 존재입니다. 이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완전한 구원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인자의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이 노아의 같을 것이며, “롯의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7:26-30 말씀입니다. “노아의 때에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멸하였으며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서도 땅에서 나름 바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합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집도 짓습니다. 언뜻 이것이 그들이 심판 혹은 심판을 받을만한 죄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삶이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는 그들이 땅에서 과부 살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들의 몸과 영혼을 원수에게 팔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이상 원수도, 원한도 없었으며, 따라서 재판관 필요가 없었습니다. 재판관을 찾기는 커녕, 오히려 스스로 죄책에 시달리며 재판관을 두려워하며 더욱 멀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양심의 고통을 잊기 위해 더욱 세상살이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우리 또한 비록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도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땅에서의 삶에 깊이 빠져버릴 있습니다. “과부 살면서 고난 중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며 주님께서 날에 이루실 구원을 대망하기 보다 오히려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땅에서 삶에 만족하면서 있습니다. 이런 삶을 ,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라하시는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마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제가 믿기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내가 세상에 다시 때에 눈물로 기도하며 나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사람을 있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A. W. Tozer 그의 The Pursuit of God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밋밋하고 건조해지는 이유는 우리 속에 거룩한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족이야말로 모든 영적 성장에 치명적인 적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간절히 원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The stiff and wooden quality about our religious lives is a result of our lack of holy desire. Complacency is a deadly foe of all spiritual growth. He waits to be wanted.)”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욕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말하는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이신 은혜들에 만족하며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원했습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애굽기 33:17-18). 다윗은 시편에서 노래하기를, “여호와를 의뢰하라 ...... 여호와를 기뻐하라 ...... 여호와께 맡기라 ......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 여호와를 바라고 도를 지키라합니다 (시편 37). 다윗의 소원과 기쁨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한복음 14:8).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하나님께 대한 욕심은 오히려 더욱 커졌습니다. 그리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욕심에 있어서 이들은 신중함이나 조심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Tozer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시지만, 지혜롭고 신중한 자들에게는 감추십니다 (God discovers Himself to babes, and hides Himself in thick darkness from the wise and the prudent).” 그렇습니다. 어린 아기가 엄마의 사랑과 보호를 찾는 것은 본능입니다. 본능은 하나님께서 아기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 아기 속에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본능을 따라 아기는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엄마를 찾습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오늘 비유 과부의 모습입니다. 그녀는 원수에 대해 원한을 갚기 위해서 끊임없이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현명하지도 신중하지도 않았습니다. 만일 그녀가 지혜롭고 신중했다면 그녀는 아마도 재판관을 괴롭히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지혜롭고 신중했다면 그녀는 재판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지혜롭고 신중했다면 그녀는 재판관을 찾는 횟수를 줄이거나 방문 사이의 기간을 늘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지혜롭거나 신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마치 엄마로부터 떨어진 아기처럼 그렇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심어놓으신 우리의 본능입니다. 아기가 본능을 따라 엄마를 찾는 것처럼 우리 영혼은 본능을 따라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타고난 본성(wild nature)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우리의 타고난 경건함은 사람들의 상식과 예절로 길들여지고 교화되었습니다. 결과 우리는 아기가 엄마를 찾듯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마치 훈련된 성인(well-disciplined grown-up)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은 좋지 않습니다. 최소한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심으신 어린 아이와 같은 야성적인 거룩한 소원(wild holy desire)”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것은 과부가 그녀의 원수를 찾아가 그와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대신에 그녀는 재판관을 찾아가 원한을 갚아달라고 청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사단 마귀는 밤낮으로 우리를 참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를 멈출 우리는 마귀에게 패배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사정에 관심이 없는 불의한 재판관으로 오해하면서 실의에 빠질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서서 우리를 위해 탄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며,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히브리서 4:14-16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알수록 많이 알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을 가질수록 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할수록 갈급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역경들 속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가장 축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람들로 주님께 발견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우리의 매일이 과부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