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 (누가복음 12:13-2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5. 2. 21. 05:28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

 

누가복음 12:13-21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함께 계실 사람이 나아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아마도 사람은 부모가 남겨준 재산을 두고 그의 형과 분쟁 중에 있었던 같습니다. 문제로 그는 예수님의 중재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부의 공정하고 공평한 분배 사회 정의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사람의 딱한 사정을 돌아보시고 그를 도우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를 돕는 대신 오히려 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사람의 문제는 이기적인 형으로 인해 생긴 재산상의 손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있는 탐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말씀입니다. 말씀의 의미를 설명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어리석은 부자라는 말은 모순적인 표현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라는 사실이 이미 그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독일 철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사회를 지배하는 규범들은 사회 구성원들의 기질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산업 사회에서 이러한 규범들이란 재화를 획득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늘리려는 이익을 내려는 욕구이며, 이러한 사회에서 많은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은 뛰어난 존재로 여겨지며 칭송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말은 사실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는 생명이고 보화이며, 재산을 획득하고, 유지하고, 불리는 방법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부자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부자라면 그는 어리석은 불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십니다. 그는 부자이면서도 어리석은 자일까요? 이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유의 넉넉함 사람을 부유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유에서, 부자는 그의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곡식과 물건을 저장하기 위해서 곡간들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지만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예비한 것이 것이 되겠느냐?” 부자는 많은 재산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 그는 전혀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조차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 그는 재산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재산의 달콤함을 즐기려고 시작할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위에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말하기를 사람들의 삶에는 가지 모드(mode)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소유 모드(having mode)이며 다른 하나는 존재 모드(being mode)입니다. 소유 모드에서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입니다. 사람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합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 자신이 위대하다고 느낍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을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의 성품이나 능력을 그가 얼마나 부자인지 혹은 그의 수입이 얼마인지를 따라 평가하는 것입니다. 소유 모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많은 재산을 모으고 그것을 지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소유를 추구하는 이런 모드의 삶을 구동(drive)하는 내적 동기는 바로 이기심(selfishness)” 게으름(laziness)”입니다.

 

많은 양의 곡식과 물건을 쌓아놓은 부자는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부자의 삶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오직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곡식과 물건을 위해서 커다란 곡간들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즐기며 여유로운 삶을 누릴 안락한 천국을 건설했습니다. 물론 그는 많은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넉넉한 소유를 통해서 그렇게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이기적이고 게으른 삶을 사는 것이 자유이며, 생명이며, 행복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꿈을 이루었을 그는 말할 없는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습니다. 자신을 모든 수고로운 일들로부터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많은 재산을 의지하여 그는 오직 자신을 위해 평안하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기를 원했습니다.

 

이기심과 게으름은 사람들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소유의 넉넉함 뒷받침을 해준다면 우리는 원하는 만큼 이기적이고 게으른 , 행복한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추구하며 부러워하는 삶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부자는 죽은 같습니다. 그의 삶은 마치 안에 빛도 없고, 움직임도 없고, 어떤 생명의 신호도 없는 거대한 무덤과 같습니다. 부자는 무덤 안에 갇힌 죽은 자입니다. 많은 재산을 의지한 이기적이고 게으른 삶은 자체로 감옥입니다. 이와 같은 소유 모드의 삶과 대조되는 , 에리히 프롬은 존재 모드 삶에 대해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모드는 명확하게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소유 모드는 눈으로 있고 손으로 만질 있지만, “존재 눈에 보이지 않으며 지문과 같이 사람마다 달라서 무한한 다양성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 모드의 삶이 갖는 근본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그것은 활발함 (being active)”입니다. 그리고 활발함이란 우리의 자산들과 능력들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의 유명한 비유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30-37). 비유에는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과 함께, 명의 사람들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나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사람을 보고는 그를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붕대로 싸매주었습니다. 그를 자신의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으며,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며 그를 돌보아주도록 부탁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제사장과 레위인은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존재 이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사마리아인은 살아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불쌍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는 부자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기심과 게으름의 덫에 갇혀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쌍한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재화와 능력을 적극적으로, 생산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그는 살아있는 존재이며, 자유자이며, 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예비한 것이 것이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자신이 모은 재산 푼도 자신을 위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부요함은 소유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부요함은 존재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사람의 존재는 그의 관계들입니다. 사람은 홀로 존재할 없으며, 홀로 부요할 없습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 부요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주는 진정한 부요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계가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말을 듣고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애굽기 19:5-6a).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태복음 4:19).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이 점차 하나님의 소유로 변해가는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거룩한 변화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소유할 , 우리는 내가 이것들의 소유자라고 생각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소유할수록 실상 우리는 소유물들에 의해 소유되고 지배당합니다. 재산에 얽매이고, 하나님과 이웃들로부터 멀어지게 되며, 자유를 잃고, 마침내 자신의 생명까지 잃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며, 생명을 주시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즐거운 마음을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이웃을 섬기는 능력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에리히 프롬은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기능적 재산(functional property)”이며 다른 하나는 비기능적 재산(nonfunctional property)”입니다. 기능적 재산은 어떤 쓸모가 있어서 갖고 있는 재산입니다. 반면 비기능적 재산은 그냥 소유 목적으로 갖고 있는 재산입니다. 우리는 자주 소유 위해 많은 재산을 원합니다. 이것이 탐욕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족한 줄로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디모데전서 6:8-9).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보화가 되시며, 우리의 즐거움이 되시며,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욕망과 열정과 목마름과 열심은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이 채워지고 만족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소유하기 원하는 보화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탐욕이며 우상숭배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든지 그것은 기능적 재산,” 소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언제든지 드려지고 사용될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재산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우리의 재산을 자유롭게 사용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소유물로부터 자유함을 얻으며 나날이 하나님께 대하여 더욱 부요해질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부요하고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우리를 참된 넉넉함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