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을 심고 의의 열매를 거두라
야고보서 3:1-18
미국은 며칠 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수개월에 걸친 선거 유세는 두 유력 후보 사이의 전쟁이었습니다. 특히 말의 전쟁이었습니다. 비록 점잖고 세련된 단어들과 표현들을 사용하지만 모든 말 속에는 상대 후보를 죽이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또 자신을 더욱 강하고,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게 보이도록 여러가지 미사여구들을 남발합니다. 이런 정치 유세에서 말은 오직 남을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전쟁을 수행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유세장에서 뿐만 아니라 TV 광고와 뉴스로, YouTube로, SNS로, 전화로 말들을 대량 쏟아냅니다. 정말 말의 홍수입니다. 이제 선거가 끝나고 사람들은 그들이 한 말을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말들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긴 자와 진 자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말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것이 후보들의 승리 혹은 패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일 뿐입니다. “맞아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해야 했어!” 이렇듯 말은 적들을 향해 쏘아대는 수 없이 많은 뾰족한 화살들과 같습니다. 활을 떠난 화살은 대부분 허공을 날다가 땅에 떨어지며, 어떤 화살은 누군가를 맞혀 해를 입히기도 하고, 혹은 활을 쏜 자가 다치기도 합니다. 이렇게 치열했던 선거가 끝나고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뉴스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람이 말이나 당나귀처럼 말을 못하는 짐승이라면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정치인은 아니지만 “말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을 제 직업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정치인들의 선거 유세와 같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점도 있습니다. 세상 나라를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법을 소개하고,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심지어 이 일에 다소간 열정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열매를 거두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이런 바램과 함께,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쟁심과 시기심”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 삼아 자유롭게 구사하며 “영적인 싸움”을 잘 싸우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나 사람의 입을 “무기”로 표현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사야 49:2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셨다”고 합니다. 또 에베소서 6:17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성령의 검”이라고 하며, 히브리서 4: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합니다. 모두 제가 좋아하는 말씀들입니다. 물론 이 말씀들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영적 싸움이 분명 정치인들의 선거 유세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의 “입”은 정치판에서의 입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오늘 말씀은 “말”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람의 말을 “입 (mouth),” “혀(tongue)”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말에 대한 많은 교훈들과 경고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6절은 말씀하기를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하며, 8절은 말씀하기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합니다. 혀가 “지옥불”이라니, 저자가 사람의 혀를 너무 무시무시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사람이 말로 짓는 죄들이 여러가지 나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거짓말 하기, 저주하기, 아첨하기, 불평하기, 자랑하기, 비방하기, 수군수군하기, 허탄한 말 하기 등입니다. 우리가 입 밖으로 내는 말들 중 많은 말들이 이 범주에 속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혀는 더욱 위중한 죄를 짓는데 동원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중 셋째 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출애굽기 20:7). 또 아홉째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하십니다 (출애굽기 20:16). 이 계명들은 주로 우리의 말을 통해서 범하게 됩니다. 실로 우리의 혀는 우리 몸 전체와 삶을 이끌어가는 첨병과 같습니다. 저자는 말하기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합니다. 또 잠언 10:19절은 말씀하기를,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입을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지혜로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사람들은 하루 평균 16,000개의 단어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말로 짓는 죄를 피하고, 말에 실수를 줄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떤 식으로 입술을 제어할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도 말의 실수에 대해서 경계를 하며, 이를 피하거나 줄이고 보다 나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언들을 나눕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이고 영적인 길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화평”입니다. 화평이 곧 우리가 혀를 제어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지혜의 뿌리입니다.
오늘 본문은 왜 사람이 혀로 죄를 짓는지, 왜 혀가 지옥불과 같은지를 설명하는 키워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시기와 다툼”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또 16절은 말씀하기를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을 때, 우리의 입은 자연스럽게 제어할 수 없이 독한 말을 뿜어내게 됩니다. 시기와 다툼의 반대는 “화평(peace)”입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화평함은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마음 속이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고 호수와 같이 잔잔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마음의 평안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또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늘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와 조화를 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십니다 (마태복음 5:9). 오늘 말씀에서도 저자는 믿는 자들을 가리켜 “화평케 하는 자”라고 합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속에는 “시기와 다툼”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나타내는 여러 상징적인 이미지들 중 하나는 “어린 양”입니다. 베드로전서 1:19절은 예수님을 가리켜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라고 하며, 사도행전 8:32절에 인용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예수님에 관해 말씀하기를 “저가 사지로 가는 어린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삶을 사신 비결 중 하나는 저가 “잠잠한 어린 양”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19절도 말씀하기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합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늘 주님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주 “영리한” 질문들로 예수님께 도전하고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을 붙잡아 십자가에 못박고 모욕하며 조롱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누가복음 23:36),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37),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39). 이들은 예수님의 자존심을 손상시킴으로써 주님을 자극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으시고 잠잠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 “시기와 다툼”이 전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변명하고 지킬 “자존심 강한 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갖 다투는 소리들에도 불구하고 잠잠히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잠한 어린 양”이시지만 동시에 “영원한 말씀”이 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다투거나 싸우는 소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화평의 복음”입니다 (사도행전 10:36).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과 일들은 “평안”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평안”을 위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어떤 말씀도 누구를 미워하시거나, 저주하시거나, 불평하시거나, 아첨하시거나, 비방하시거나, 험담하시거나 해서 하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화평하시기 위해서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 사이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4:3,4절에는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느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혹은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 지방으로 여행할 때는 그 사이에 위치한 사마리아 지방을 피해서 먼 길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에 서로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9).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야 했습니다. 이는 그곳에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여자를 만나서 그녀에게 화평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아주 먼 데서부터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을 이 여자에게 나눠줄 “평화”로 가득 채우셨습니다. 예수님께는 다른 목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위해 먼 걸음을 하셨지만 이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며 말을 거시는 예수님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며 퉁명스럽게 반응했습니다. 이는 이 여자가 특별히 퉁명스러운 여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그녀가 세상에서 늘 사람들의 독한 험담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녀에게 따뜻한 평화의 말을 건넨 적이 없습니다. 그녀에게 “사람들의 입”은 마치 살을 태우는 지옥불과 같았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 이 “물을 좀 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오염되지 않은 참으로 순수하고 깨끗한 물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죄도, 악도, 욕심도, 미움도, 편견도, 속셈도 없습니다. 오직 평안입니다. 비록 여자는 습관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퉁명스럽게 반응했지만, 그녀는 속으로 몹시 놀랐을 것입니다. 마치 봄 바람이 피부를 어루만지며 그 따스한 온기가 살 속으로 파고들 듯, 그렇게 주님의 음성이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감싸고 녹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평안”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어떻게 하면 정숙한 여자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도덕 강의”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주님께서 그녀에게 주실 선물이 무엇인지를 소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한복음 4:10).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 이 불쌍한 사마리아 여자를 찾으신 유일한 목적은 그녀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그렇게 자비로우시며 평화로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여자는 그 선물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그녀는 속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내가 누구인지 내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안다면 당신은 내게 하나님의 선물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내게 물을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화평함으로 그녀에게 오셨지만, 그녀는 자신의 숨은 과거가 드러날까 하여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그녀는 깜짝 놀라서 황급히 대답했습니다. “아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그녀는 이 처음 경험하는 평화로운 대화가 곧 이전에 그녀가 경험했던 것들처럼 불미스럽게 끝날 것이라는 슬픈 예감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맙소사!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 전혀 당황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그녀의 거짓말에 대해서, “네 말이 옳도다,” “네 말이 참되도다” 하셨습니다. 비록 그녀의 허물이 드러났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치 그것을 모르는 듯, 그것을 보지 못한 듯 그렇게 그 허물을 즉시 덮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셨습니다. 이 평안은 그녀의 정숙함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화평과 진리가 가득한 예수님의 은혜롭고 인자한 말씀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녀의 감추고 싶은 과거에도 더욱 자비로우신 예수님으로 인해 그녀는 더욱 평안하고 더욱 행복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랑의 관계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허풍쟁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께 대해 얼마나 충성스러운지를 자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자신 있게 반박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심지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마가복음14:27-31).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아시는 자신”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허풍쟁이가 아니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평화를 회복했습니다. 이 평안은 그의 충성심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화평과 진리가 가득한 예수님의 은혜롭고 인자한 말씀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 속에, 베드로의 마음 속에,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 평안의 말씀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겸손하고 친절한 “화평케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독한 시기와 다툼”으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심으신 평화로 삽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이 다 이 평안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하며 무슨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안의 복음, 화목케 하는 말씀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주께로 우리로 예수님을 통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안의 지혜를 받게 하시며, 우리 또한 세상에서 우리의 입을 통해 예수님을 닮은 화평케 하는 자의 일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메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야고보서 5:1-20) (0) | 2024.12.01 |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 믿는 자의 온전함(integrity)에 관하여 (야고보서 1:1-21) (0) | 2024.10.30 |
간음하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0:14) (0) | 2024.09.25 |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애굽기 20:12) (2) | 2024.09.23 |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4-6) (0) | 2024.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