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구원의 지식 (누가복음 1:68-79)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5. 2. 14. 22:46

구원의 지식

 

누가복음 1:68-79

 

사형 판결을 받은 죄수가 있었습니다. 형을 집행하는 그는 가까이 지내왔던 교도관에게 귀속말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무서운 죄를 짓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뒤늦게 사실을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지식 없음으로 그는 잘못된 선택을 하였고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아는 것이 힘이 있을까요?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 등이 주연한 나바론 요새 2 (Force 10 from Navarone)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무리의 연합군 특공대는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거대한 댐을 폭파하려고 합니다. 특공대원 밀러(Miller)라는 폭약 전문가가 있어서 그가 댐을 폭파할 폭약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명의 대원이 밑으로 숨어들어 폭약을 설치하고 폭파시켰습니다. 이들은 폭발로 인해 댐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살아날 없음을 알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일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폭약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댐은 멀쩡했습니다. 위에서 댐을 내려다보면서 그것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던 다른 대원은 몹시 실망하며, 폭약을 준비한 밀러를 비난했습니다. “뭐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하지만 밀러는 아무렇지도 않은 침착하게 담배를 피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겨우 작은 꾸러미의 폭약을 가지고 화산과 같은 거대한 폭발을 기대하면 안되지. 이제 자연이 일을 하도록 맡겨. 시간을 주고 기다려 . 그러면 그것이 알아서 일을 할거야 (You can’t expect an enormous volcano with three tiny bags of explosives. You have to let nature take her course. Give it time. It’ll work).” 과연 밀러의 말대로 시간이 조금 지나자 댐의 천정에 균열이 생기고 물이 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전체가 붕괴되면서 상류에 갇혀 있던 물들이 세차게 흘러내렸습니다. 밀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폭약을 설치하러 대원들이 밖으로 빠져나올 있도록 시간 여유를 주면서 동시에 거대한 댐이 무너지기에 필요한 폭약의 양을 정확히 계산했습니다. 그가 댐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용한 것은 사실 폭약 아니었습니다. 그의 지식이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지식은 댐에 갇혀 있는 물의 관한 것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안했습니다. 그리고 겨우 꾸러미의 폭약을 가지고 일을 해내고 많은 생명들을 구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말씀도 지식 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아내 엘리사벳을 통해 아들 요한을 얻은 직후 성령이 충만하여 전한 예언시입니다. 시에서 사가랴는 자신의 아들 요한이 장차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76-78a 말씀입니다. “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앞에 앞서 가서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세례 요한의 사명을 마디로 요약하면 주의 백성에게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주의 백성에게 사함을 통한 구원에 관한 지식(knowledge) 전하는 입니다. 지식이야말로 우리가 죄를 이기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 됩니다. 세례 요한은 구원의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사가랴는 아들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중에 요한보다 이가 없다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28).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는 대개 모세와 엘리야를 꼽습니다. 이들은 모두 능력에서 뛰어났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많은 이적들을 행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생애 동안 아무런 이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가 여자가 낳은 자들 가장 크다고 하십니다. 그럴까요? 이는 그에게 구원의 지식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죄사함을 통한 구원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가장 뛰어난 자이며, 가장 강한 자이며,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알기 때문입니다.

 

마치 물의 흐름을 막고 있는 거대한 댐과 같습니다.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없는 사막에서 고역에 시달리는 노예와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사람들의 죄와 상반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72절은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 하며, 78절에는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합니다. 68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백성을 돌아보셨다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마치 거대하게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하지만 사단은 사람들을 안에 가두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없게 합니다. 그래서 아래 갇힌 사람들의 삶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애굽 바로 앞에서 모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겨우 지팡이 하나를 들고 있는, 양치는 노인네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모세에게는 사람들에게 전할 지식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6:5-8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팔과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야 것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을 구속하시고,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모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노예 백성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긍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신실하심과 긍휼하심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땅으로 인도하는 능력이며 지혜입니다. 모세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바로가 이를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6:7, 7:5, 7:17, 9:29, 10:2, 11:7, 14:4, 14:18, 16:12, 29:46).

 

출애굽기에 반복해서 나오는 다른 키워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애굽 바로에게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4:23, 5:1, 6:5-7, 7:16, 8:1, 8:20, 9:1, 9:13, 10:3).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구원은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원수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께로의 헌신입니다. 사가랴의 시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74-75 말씀입니다.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먼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는 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단순히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는 그치지 않습니다. 나아가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는 입니다. 하지만 말씀은 구원의 의미로 그렇게 마음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특히 성결과 (holiness and righteousness)”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거룩함과 의는 분리,” “구별됨 의미합니다. 그리고 분리는 긴장과 싸움과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은 거룩하기 위해서 더러운 피하고 멀리합니다. 사람들은 죄인을 정죄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의로 여깁니다. 사도행전 21:28절에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체포한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저가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거룩함 지키기 위해서 더러운 이방인의 출입을 금하고 규정을 위반한 사도 바울을 붙잡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까지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꿈에서 땅의 짐승들과 공중의 새들이 보자기에 담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잡아먹으라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럴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사도행전 10:11-13). 그러자 소리가 나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거룩하고 의롭게 하기 위해서 더러운 것을 멀리하고 죄인을 정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시는 거룩함이며,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의롭게 하는 입니다. 요한복음 17:17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로마서 3:25-26절은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셔서 우리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셨다 합니다. 죄는 거대한 댐과 같습니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합니다. 죄는 사람들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거룩한 자와 더러운 자로, 의인과 죄인으로 분리합니다. 심지어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하며, 죄인들에게 그러하듯이 개인을 높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독방 안에 가둡니다. 안에서 그는 세상에 사랑이 있음을 알지 못한 괴로운 삶을 삽니다. 그는 너머로 넘쳐흐르는 거대한 사랑의 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무지함 속에서 죽어갑니다.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지식을 전하기 위해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영화 나바론2에서, 댐을 무너뜨리기 위해 명의 대원들이 댐의 내부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의 깊은 뿌리에 다다랐을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남편을 불러 오라” (요한복음 4:16).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밤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 26:34). 예수님의 말씀들은 마치 작은 폭약 주머니와 같아서, 완악하고 죄악된 우리의 내면 속에서 터지고 철옹성 같은 우리의 죄성에 균열을 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 속에 숨어있는 죄의 본진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우리의 영혼 속에 흐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가랴의 찬송시에서도, 사람들은 원수의 손에 붙들려 있으며,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매우 강한 죄의 권세에 눌려서 사람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신 그들의 원수를 사랑했습니다. 이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강한 구원의 뿔이 되시고 (69), 생명과 빛을 주시는 돋는 해가 되셨습니다 (78).

 

우리의 원수는 우리를 미워합니다. 그럴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지식이 없을 우리는 오히려 원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원수에게 속아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신다고 불신하며 세상에 사랑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그리고 우리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지식을 알게 하십니다. 구원은 죄사함을 통해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사단의 진지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흐르게 하는 진정한 구원입니다.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함을 알게 됩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는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성결과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결과 의는 오직 하나님의 성결과 의를 아는 지식에서 나옵니다.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기뻐하며, 우리 또한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무겁게 하며,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결과 의는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자유와 능력을 줍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를 나눌 있도록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흐르는 물로 씻음을 받을 거룩한 물이 우리를 깨끗케 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서게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입니다. 이새의 가지, 예수님을 통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9). 폭약 전문가 밀러는 이제 자연이 일을 하도록 맡겨!”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그리고 세상에 흘러 넘치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찬양 “Let the River Flow” 듣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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