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예수님 우리의 완전한 평화 (누가복음 23:1-5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5. 4. 14. 14:04

예수님 우리의 완전한 평화

 

누가복음 23:1-56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시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기초로 평화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완전한 평화 되시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peace)” 원하고 추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의 거의 대부분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축복하면서 성도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만큼 그것을 얻기가 어렵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평화 얻을까요? 심리학 용어로 수용(accommodation)” 동화(assimilation)”라는 서로 상반된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개인이 새로운 정보나 경험에 대하여 반응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수용이란 자신이 갖고 있는 기존의 사고 체계에 맞지 않는 새로운 정보나 경험을 만났을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의 사고 체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the process of modifying existing mental structures to incorporate new information or experiences that don't fit into those existing structures). 예를 들어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만났을 우상 숭배를 그만두고 예수님을 그의 유일한 주님으로 경배한다면 그것을 수용이라고 있습니다. “동화 새로운 정보나 경험을 만났을 그것을 자신이 갖고 있는 사고 체계에 맞게 변형시켜 통합시키는 것입니다 (the process of integrating new information and experiences into existing mental frameworks or schemas). 예를 들어 우상 숭배자가 기독교 복음을 들었을 그것을 왜곡시켜서 그가 다른 우상들에게 하듯 예수 상을 세워놓고 앞에서 복을 빈다면 그것은 동화입니다. 수용이나 동화는 비록 서로 반대되는 행동 양식이지만 모두 개인이 새로운 정보나 경험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화평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지향하는 바가 비슷하다고 있습니다.

 

150 , 한국이 외국에 항구를 개방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에 많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외국인인 그들이 낯선 아시아 국가에 정착하고 한국인들과 함께 사는 것은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어떤 선교사들은 수용, 그리고 어떤 선교사들은 동화 선택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인들의 생활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인의 옷을 입고, 심지어 이름까지도 한국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자신을 바꿈으로써 한국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그들과 화평하고자 했습니다. 반대로 어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생활 양식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옷과 음식은 물론, 서양식 주택을 짓고 살았습니다. 게다가 서양식 학교와 병원을 짓고 사람들에게 영어와 서양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한국인들을 미국 문화와 생활 양식에 동화시킴으로써 그들과의 평화를 도모했습니다. 이것은 수용과 동화의 좋은 예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수용과 동화의 나쁜 예도 경험했습니다. 1910 한국은 일본에 병합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한국인들의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일본 정부는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동화정책들을 시행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한국인들을 일본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한국인들에게 창시 개명, 신사 참배, 일본어 사용 등을 강요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나라 사이의 단결과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실상 동화 정책들은 식민 지배와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수단들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이를 미워하고 저항했지만, 일부는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한 특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국 역사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 이들은 평화 누렸습니다. 요즘은 수입 상품들에 대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가 화제입니다. 트럼프는 거의 모든 나라에 과도하게 높은 관세를 부과했습니다. 여러 나라들이 앞다투어 트럼프에 전화를 하고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이들은 트럼프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함으로써 높은 관세를 피하고 미국과의 통상을 계속하고자 원했습니다. 말하자면 평화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나라는 높은 관세로 맞섰습니다. 어느 쪽이 수용 의사가 없고 상대를 동화시킬 힘도 부족하다면 평화 소망이 없이 싸움이 끝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나라들은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 매일 끊임없이 수용 동화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런 노력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세상을 움직이는 동인들에 있습니다. 세상과 안에 사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인들은 권력과 (이익), 그리고 이것들을 좇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심, 그리고 거짓된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매일 권력과 돈에 대한 그들의 욕심으로 인해 부딪히면서 갈등하고 경쟁하고 싸웁니다. 그런 와중에 혹은 수용 통해, 혹은 동화 통해 새로운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다른 나라들 혹은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있는 길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그런 현상들을 관찰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 권력들이 나옵니다. 가장 먼저는 로마 황제 가이사 정치 권력입니다. 가이사 만큼은 아니지만 빌라도나 헤롯도 상당한 권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종교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권세 등에 업고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힘을 합하면 군중의 힘을 행사할 있습니다. 권력은 때로 지배자들의 권력을 압도합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와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2). 이들의 고소는 갈등을 부추길만한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는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세금을 냄으로써 충성심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유대인의 으로 높이며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것은 사실 이들의 이기적인 욕심과 시기심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악함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가이사의 충신 것처럼 거짓되게 행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가이사를 자신들의 왕으로 수용했습니다. 예수님을 신문한 빌라도는 예수님께 아무런 죄가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4). 하지만 사람들은 소리로 재촉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빌라도는 (마태복음 27:24) 결국 이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 거짓된 불의와 타협해서 빌라도는 평화 얻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의 평화 엿볼 있습니다. 12 말씀입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예수님께 대한 고소 건을 처리하면서 둘은 서로의 권세를 인정하고 사건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없는 유대인의 마음대로 이리 저리 보내고 조롱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높은 권세에 대해 없는 자부심을 느끼며 서로의 행운에 경의를 표하는 윙크를 보냈을 것입니다. 집요한 요구로 빌라도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35). 이들은 예수님께서 없이 체포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의 사나운 욕심과 시기심에 예수님을 동화시킴으로써  비로소 자신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마음에 평안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평화를 얻었습니다. 평화는 불의한 욕심들, 권력들, 거짓말들이 서로 부딪히고,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지극히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평화입니다. 유대인들은 결코 가이사를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가이사에게 세금 내는 것을 기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심으로 인해 예수님을 거짓 고소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10). 그는 자신에게 굴욕감을 유대인들을 속으로 미워하면서 이에 대한 복수의 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빌라도와 헤롯은 바로 다음날부터 다시 권력과 이권을 놓고 서로 싸우는 원수가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빵을 사고 세금 돈을 벌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단한 노동일을 감당해야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하루살이 평화가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평화는 사납고 이기적이고 사람들이 치열한 힘겨루기를 통해 도달한 아주 잠깐의 타협입니다. 그리고 평화는 사실 전혀 평화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면서도 조바심 가운데 내일 있을 다른 힘겨운 싸움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좁은 땅에서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생존해야 하는 모든 인류에게 피할 없는 운명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 속에 사랑이 없고 욕심만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자는 여전히 많은 권력을 원하며,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한 자도 여전히 많이 갖기를 원합니다. 싸움은 끝이 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수용 동화 가장 훌륭하게 구사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진정한 평화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어떻게 다를까요? 예수님의 평화는 완전하며 영원합니다. 어떻게 그럴 있을까요? 예수님의 평화는 진리 기초합니다. 세상의 평화는 트럼프의 마음처럼 변덕스럽고 변화무쌍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평화는 진리 기초합니다. 진리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47절에 로마 백부장이 일을 보고 말하기를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백부장은 예수님께 대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마태복음 27:54; 마가복음 15:39). 세상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과시하고 증명하기 위해 권력을 함부로 휘두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권력은 일장춘몽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영원하며 권세와 영광은 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번도 자신의 과시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권세를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받아들이도록 위협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변함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평화의 으로 항상 거기 계십니다. 주님의 왕권이 견고한 만큼 우리의 평화 또한 굳건하며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사랑 기초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품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세상의 평화는 조건적이고 일시적입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조건들은 매우 까다로우며, 조건들이 지켜지지 않으면 평화는 즉시 깨어집니다. 평화는 중요한 위해 쉽게 포기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심지어 없는 자신을 미워하며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를 사랑하십니다. 심지어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 예수님을 비웃고 있는데도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한 평화는 깨어질 없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평화입니다. 제가 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허물을 책망하신 적이 번도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믿음 없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들의 모든 허물을 덮고도 남을 만큼 차고 넘쳤습니다. 사랑을 믿지 못하고 염려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평화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바꿔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을 믿는 믿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평안을 누릴 있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능력 기초합니다. 능력은 구원의 능력이며 전능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좌우편에 명의 행악자들 함께 못박혔습니다. 그런데 하나가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42-43). 대화는 참으로 기이합니다. 우선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 중에 죽어가는 상황입니다. 행악자 또한 이제 구원 바라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영광스럽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께는 불쌍한 죄인을 구원하시고 낙원으로 인도하시는데 문제가 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방의 최고 통치자였지만 없으신 예수님을 거짓 고소로부터 보호하지 못할 만큼 무능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죄인을 체포하고, 고소하고, 정죄하는 데는 힘이 세지만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는 전혀 무능합니다. 그들의 능력은 오직 사람들을 두렵게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능력은 전능해서 심지어 앞에 죽음을 앞둔 사형수까지도 능히 구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수용 동화 통해서 평화를 구합니다. 하지만 최선의 수용 동화로도 우리는 결코 평화에 이를 없습니다. 우리가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되고 완전한 평화를 갖게 됩니다. 사실은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완전한 평화 되십니다. 이는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사랑에 조건이 없으며, 그의 구원의 능력에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평화가 이미 거기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수용하고 동화시키는 씨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꿀 필요가 없으며 주님께서 바뀌실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평화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지배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노예로 만드시고 착취하시기 위해 평화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자신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며, 하늘의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의 평화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완전한 평화로 누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바로 지금 그리고 영원히 우리 영혼이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서 발견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