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1-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5. 5. 12. 21:26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1-8

 

오늘 말씀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전하신 약속과 명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세상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건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단지 2000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해프닝에 불과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사실 사건의 의미를 가장 아시고 이를 우리에게 설명하실 있는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엿볼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 바로 제자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며, 우리 각자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3절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주님의 부활하였음을 여러 증거로 보이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때니이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대해 얘기합니다. 이는 제자들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곳으로 벗어난 관심으로 인해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 갇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는 이스라엘 나라 사실 나의 나라(my kingdom)”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예수님께 투자했습니다. 그것은 나은 미래의 위험한 모험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9:27-28절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쭙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성령의 능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굳게 자리잡고 있는 그들 만의 천국 이스라엘 나라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과거의 나라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천재 물리학자인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발표하여 시공간을 이해하는 현대 물리학의 기초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합니다. 물리학자들조차 이해하기 어렵다는 그의 이론들을 여기서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 제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그의 연구 방법입니다. 아인슈타인은 혁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상자 밖에서의 상상과 생각 필수적인 요소임을 알았습니다 (Einstein understood that imagination and thinking outside the box were vital ingredients to innovation) (thedecisionlab.com). 여기서 상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던 아이작 뉴턴의 고전 역학 이론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보이는 현상들을 관찰하고 이를 방정식으로 표현했던 것과는 달리, 아인슈타인은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이라는 달리는 열차, 가속하는 엘리베이터 속의 상황 등을 머리 속으로 상상하면서 생각으로 하는 실험 - 연구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는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작용들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를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읽어본 아인슈타인의 전기에는 그가 망원경을 가지고 하늘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오직 생각만으로 여러 물리학 이론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차후 정교하게 설계된 실험과 관찰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오직 생각과 상상 통해서 보이는 세상 뒤에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진실을 찾아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비슷한 예들을 찾아볼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백부장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병든 종을 치료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가시려고 하자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말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사람이요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바와 같은 초라한 행색의 갈릴리 사람 아니었습니다. 그의 생각 속의 예수님은 심지어 죽을 병조차도 말에 떨며 쫓겨나가는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최고의 지배자였습니다. 그의 머리 세상은 되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는 예수님의 뒤로 몰래 와서 그의 옷을 만지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당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밀고 당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혈루증 앓는 여자는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의 생각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녀가 만진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 속에 떠밀리며 속히 지나가는 어떤 유대인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체할 없는 능력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심지어 그녀와 같은 최악의 경우라도 아주 쉽게 낫게 하시는, 구원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상자속에 들어 앉아서 세상을 관찰하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상자 속에 안전히 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찾으며 혜택을 누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상자 이스라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의 나라입니다. 물론 속에서도 제자들은 생각하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상상은 하나님 나라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들, 그들이 걱정하는 것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붙들고 씨름하느라 그들의 모든 정신적, 영적 에너지를 소진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생각하고 상상하고 시각화 (visualize)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노력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반대로, 보이는 세상 나라는 마음 가득히 담고 시시각각 생각하고 상상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마음에 담지 않으며 오직 눈으로 보려고만 하며 보여달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38).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의 불신을 고집하면서 뭔가를 보여 자신들을 믿게 만들어 보라고 도전했습니다. 떡을 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한복음 6:30-31). 이들의 상식에 따르면 구원자 광야에서 모세가 것과 같이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상자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상자 밖으로 나가는 대신 하나님을 붙잡아 상자 안으로 꾸겨 넣으려 했습니다. 우리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각자는 나의 세계라는 상자 속에 갇혀 있습니다. 안에는 많은 크고 작은 욕구들과 필요들과 걱정들과 문제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혼탁함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인생에 뭔가 도움이 될만한 나의 하나님 구하며 기도하고 이름을 부릅니다. 하지만 바쁘고 분주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여유조차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관해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바가 아니라” (7). 말씀은 매우 가혹합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고 그들의 인생 전부를 투자한 제자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제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이제 하늘로 승천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바가 아니라 하십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인생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하시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 나라의 마음을 쏟으라고 하십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엄청난 학문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을 궁핍하게 보냈습니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의 특허사무소에서 3 직원으로 하루 8시간을 일하면서 빠듯한 월급으로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후에 고등학교 수학 교사 직에 지원했지만 20명의 지원자들 명의 뽑는 1 심사에도 끼이지 못했습니다. 유명한 과학자가 아인슈타인이 논문을 보고 그를 만나기 위해 특허사무소를 찾았는데 로비에서 그를 보고도 설마 초라한 사무원이 아인슈타인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지나쳤다고 합니다. 후에 아인슈타인은 유명해져서 대학 교수로 초빙이 되었지만 그의 월급은 특허사무소 3 직원의 월급과 똑같았고, 그의 강의에 등록한 학생은 겨우 명이며 그중 명은 특허사무소의 친구들이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학문을 그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데 사용할 생각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바로 학문자체였습니다. 비좁은 사무실에서든, 셋집의 다락방에서든 그는 혼자일 세상의 문을 닫고, 그의 머리 속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우주로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백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합니다 (빌립보서 3:7-8a). 말하기를 살든지 죽든지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합니다 (빌립보서 1:20a-21). 사도 바울은 풍요롭고 고상하고 존귀한 삶을 위해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에게 풍요로움 되시며 고상함 되시며 존귀함 되십니다. 심지어 자신에 생명에 대해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합니다. 그는 완전히 이스라엘 나라혹은 나의 나라라는 상자 밖으로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 살았습니다.

 

8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 성령님에 관하여 예수님께서는 4절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하시고 5절에는 너희가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셨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일반상대성 대하여 J.J. Thomson이라는 영국의 물리학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의 단편적인 과학적 발견 (an isolated result)” 아니라 수많은 과학적 함의를 담은 대륙(a whole continent of scientific ideas)”라고 설명했습니다. 사람 아인슈타인의 깊은 성찰과 탐구를 통해, 태고적부터 감추어져 있던, 현대 과학을 떠받칠 거대한 대륙이 갑자기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과학 기술이 발견에 기반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GPS 위성들은 지구상의 정확한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반드시 일반 상대성 효과를 계산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단순히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위대한 사람 아니며,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단순히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위대한 사건 아닙니다. 예수님은 대륙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새롭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로부터 오며, 그를 통해 존재하며, 그를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 하십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마리아에게 저에 관한 짧은 증언 부탁했습니다. 아빠가 그동안 그녀에게 아빠가 아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어떠했는지를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마리아가 저에 관해 짧은 글입니다.

 

When my dad first explained to me the topic of today's message, I couldn't help but laugh a little. The reason was, all my life, since I can remember, one thing I always mentioned to friends and acquaintances when describing my dad is that every conversation, no matter how it started, would end up in a discussion about Jesus. I could be talking about feeling nervous for an exam, a boy that I liked, or a conflict with friends - it did not matter - the conversation would always lead to a passage in the Bible and something about Jesus.

 

To be honest, I would feel annoyed sometimes because I wanted my dad to be interested in what I was talking about, not always turn it around to Jesus. And once my dad started talking about Jesus, it would turn into almost an entire sermon, and at times I did not have the patience or interest to listen.

 

But I also admired the love he had for Jesus. He loved God's Word and always held it close to him. Even when he fell asleep at his desk, his Bible was always nearby. Looking back, I think my dad was that way because he couldn't help but want to share about Jesus all the time. The immensity and great love of God was too big to contain. And now, as I am learning more about God and His Word, I feel very privileged and grateful to have a dad who can share that passion and excitement with me.

 

(처음에 아빠가 설교의 주제를 설명할 저는 잠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저의 기억이 미치는 생애의 모든 날들에서 제가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아빠에 대해 설명할 항상 언급했던 가지 사실은 내가 아빠와 나누는 모든 대화가, 그것이 어떻게 시작됐던, 항상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대화의 주제가 시험을 앞둔 초조함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거나, 혹은 친구들과의 갈등이거나 상관이 없이 대화는 항상 성경 속의 어떤 말씀으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어떤 이야기로 흘러갔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가끔 이런 아빠가  짜증이 때도 있었습니다. 아빠가 항상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는 대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일단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어느새 거의 편의 설교가 되었으며 때로 저는 설교를 끝까지 들을 인내심이나 집중력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예수님께 대한 아빠의 사랑에 놀라곤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것을 가까이 합니다. 심지어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어도 그의 성경책이 머리맡에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과 나누기를 간절히 원했기에 그것이 아빠의 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사랑은 그냥 마음 속에만 담고 있기에는 너무나 큽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과 말씀을 배워가고 있는 제게는 이런 열정과 감동을 내게 나눠줄 있는 아빠를 가진 것을 특권으로 믿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딸이 저에 대해 글을 읽고 기뻤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평생을 걸쳐 이루고자 애썼던 것은 우주에 대한 보다 완전한 설명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일장 이론 (unified field theory)”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자기력과 중력과 양자역학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우주에서 관찰되는 모든 힘들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요한복음 14:6a).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 (요한계시록 1:17b). 이것이 바로 제가 딸과 나누는 대화들에서 주제와 상관이 없이 항상 대화의 결말을 예수님께로 이끌어갈 있는 이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찾고자 했던 통일장 이론 알고 있다고 스스로 자랑할 있겠습니다. 히브리서 1:3절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시며, 오늘 말씀에 따르면, 성령님은 예수님께로부터 (from Jesus) 오시며, 예수님을 통해 (through Jesus) 우리 안에 임하시며, 예수님을 위해서 (for Jesus) 우리가 그의  증인으로 있도록 능력을 주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나라에서 권능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설명하는 통일장 이론 알아야 합니다. 권능은 성령님이시며, 권능은 오직 그리스도부터 와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역사합니다. 우리가 (I)라는 상자안에 갇혀 있을 우리는 어둠과 무기력과 외로움과 공허함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I)라는 상자를 빠져나갈 길도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역사하는 권능으로 , 우리는 상자를 깨뜨리고 벗어날 능력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백합화가 만개하여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예수님 안에서 계획하신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 성령의 권능 안에서 영광스러운 자유와 아름다움과 기쁨을 누리도록 우리 각자를 축복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