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에스더에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2. 11. 29. 14:50

마리아, 에스더야!

지난 밤 내린 비 때문인지
아침 공기가 참 맑고 시원하다.
잘 잤니?

가끔 우리들 마음 속에 생기는
질문들 중 하나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이 더욱 "죄악"되게 보여서
크게 낙심이 될 때도 있단다.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내가
또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아빠가 여기서 말하는 "믿는 자"란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를 말한다)
무슨 차이가 있는걸까?

그 차이는 이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죄를 감추고 즐기는 자"이고
"믿는 자"는 "죄를 드러내고 슬퍼하는 자"다.

안타깝게도 둘 다 여전히 "죄인"임에는 별 차이가 없단다.

하지만 한 사람은 그 죄를 감추고 즐기며
다른 한 사람은 그 죄를 드러내고 슬퍼한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란다.

로마서 7:15절에서
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한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이 말씀에서
"원하는 이것"이란
"율법이 요구하는 선하고 거룩한 삶"이고
"미워하는 그것"은 "죄 곧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이다.

19절에서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 하고

또 24절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하며 탄식한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후
우리 안에 생긴 "굉장히 중요한" 변화들 중
한 가지를 말해준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마음이 죄를 미워하게 되고
그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다.
이 훌륭하신 하나님의 종도
여전히 "악한 욕심"을 갖고 있으며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렇게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 뿐 아니라
"모든 진실하게 믿는 자들"이 겪는 아픔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평생 깨어서 견뎌야 하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라는 성경 선생이 있다.
이 분은 훌륭한 글들을 많이 쓰셨는데
그 중에 on Man's Perfection in Righteousness"라는 글이 있다.
제목이 좀 어려워 보이지?

이 글의 요점은
사람이 "완전한 의"에 도달하는 것은
즉 "전혀 죄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혼자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며
또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Our righteousness in this pilgrimage is this -
that we press forward to that perfect and full righteousness"
(이 순례에서의 우리의 의는 이것이다 -
즉 완전하고 충만한 의를 향해서 힘써 나아가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사는 동안의 "우리의 의"는
"완전하고 충만한 의"가 아니라
"완전하고 충만한 의를 향해 힘써 나아가는 것 (pressing)"이다.

이 "pressing"이 바로 "믿는 자의 의"란다.
이 "pressing"이 바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란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런데 또 문제가 있단다.

"완전한 의"를 향해 힘써 나아갈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더욱 "의롭게" 되는 자신이 아니라
더욱 "죄악된" 자신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뭐랄까 쉬울 것 같아 보였는데
막상 해보려고 하니 그게 잘 안되는 거 있지.
잘 안되는 게 아니고 전혀 안되는거야.

오히려 숨은 죄들까지 드러나
전보다 더 나빠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포기하고 그냥 옛날처럼 살아야 할까?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쉽지 않단다.

우리 마음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니
죄를 짓는 것도 옛날처럼 편치 않단다.
또 무섭기도 하고 ...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는거지.

사도 바울 선생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탄식할 수 밖에 없다.

마리아, 에스더야!

우리가 어떻게
이 오도 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을
이겨 나갈 수 있을까?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이 "완전한 의"로 가는 길이다.)

예수님께서 내 죄에 대한 댓가를 다 치르셨으며
내 죄를 다 가져가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내 죄를 다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예수님 안에서 의로워지는 것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주 한번 청소차가 올 때
집안에 있는 쓰레기들을 꺼내 놓는다.
그러면 청소차가 이것들을
다 수거해 가지.

청소차가 오기 전에
모든 집들에 같은 양의 쓰레기가 있었다고 하면
청소차가 지나간 후 어떤 집이 가장 깨끗하게 되었을까?
가장 많은 쓰레기를 꺼내 놓은 집이겠지!

혹시 어떤 사람은
그 집 앞에 수북하게 쌓인 쓰레기를 보고
"어휴 더러워!" 하고 흉을 볼 수도 있을거야.
하지만 사실은 그 집이 가장 깨끗하지.

너희도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기 위해서란다.

우리 죄를 가져가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밝은 불을 켜시고
우리 죄를 드러내신다.
그리고 드러난 죄들을 가져가신다.

아빠가 "죄인이 되라"고 한 것은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니고
바로 이 예수님의 빛 가운데 나아가
너희의 마음 깊은 곳에 숨은 죄들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빛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죄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우리는 "더 큰 죄인"이 되는거야.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가는 자는
"가장 큰 죄인"이 된단다.
가장 많은 쓰레기를 내 놓은 집처럼 말이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15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마리아, 에스더야!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고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진리란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둘째,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나는 "완전한 (total) 죄인"이고
예수님은 "완전하신 (perfect) 구주"이시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란다.

그리고 "오직 이 진리 안에서만"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맺어진단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 중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하며
예수님께 발을 내밀지 않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발은 냄새도 많이 나고
생긴 것도 썩 이쁜 편이 아니지.
또 우리 몸에서 가장 쉽게 더러워지는 부분이다.

그러니 늘 생각이 반듯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런 발을 내밀고
씻으시도록 맡긴다는 것이 내키지 않겠지.

하지만 이렇게 예의 바른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뭇 심각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맺어진 관계인가를 잘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것은
베드로가 "예의 바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란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것은
바로 베드로의 "냄새 나는 발" 때문이란다.
그리고 그 발을 씻기시기를 원하신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전혀 다르지 않니?

사람들은 보통
좋은 점들만 보여 주고
좋은 점들만 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어쩌다가 나쁘거나 약한 모습을 보면
실망하고 심지어 관계를 끊는단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반대란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약한 것
우리의 가장 더러운 것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것을
보기를 원하신단다.

그런 것들은 예수님께서 다 가져가시고
대신 우리들에게 좋은 것(성령님)을 주셔서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신단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알겠니?

음...
아직은 잘 모를 것이다.

"예수님의 은혜의 크기"를 알려면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내 죄의 크기"를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 선생님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라고
탄식하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로마서 7:25) 하며
예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 에스더야!

"나의 죄인 됨"을 아는 만큼
"예수님의 은혜"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내 죄가 더 많이 드러날 때
더욱 간절하게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된단다.

결국 내가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면
이제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된단다.

이게 바로 아빠가 말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완전한 의"로 나아가는 길이란다.

마리아, 에스더야!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죄인"이라는 점에서는
별로 다를 바가 없단다.

그런데 "같은 죄"가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한단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씻지를 않아서
발에 때가 새까맣게 낀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양말을 신고 있어서 때가 안 보인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이들의 발을 씻어주시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어떤 사람들은
"아이구 이제 살았다!" 하며
얼른 예수님께 나와 양말을 벗겠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더러운 발이 드러날까봐 두려워
조용히 그곳을 떠나든지
아니면 오히려 화를 내며 예수님을 쫓아내든지 하겠지.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 죄"로 인해 끊임 없이
예수님께로 나아가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죄"로 인해 끊임 없이
예수님로부터 멀어진다.

이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란다.

누가복음 18:10-14절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다.

바리새인은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며
"죄 없음"을 자랑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긍휼을 구한다.

이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하신다.
그래서 성경에 세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박는다.

또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예수님의 좌우에 두 사람이 함께 못박혔단다.
이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진짜 죄인들이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매우 다르다.

한 사람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마땅히 받을 벌을 받는다고 하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구한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은혜를 구한 행악자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며
그를 축복하신다.

이 두 사람과 같이
우리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할 죄인들이란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어떤 이는 예수님의 우편에 있는 행악자이고
어떤 이는 예수님의 좌편에 있는 행악자라는 것이다.

아빠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겠지?
이해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 깊이 깨닫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랑한다 딸들아!

'마리아 에스더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유하는 것, 소유되는 것  (0) 2012.11.29
십자가  (0) 2012.11.29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0) 2012.11.29
가장 큰 구원  (0) 2012.11.29
뒤에 있는 것, 앞에 있는 것  (0) 2012.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