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하라
누가복음 6:32-36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으로부터 특별히 구별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자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곧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는 자들의 삶은 믿지 않는 자들의 삶과 여러 가지로 다를 것입니다. 이렇게 새벽 시간에 깨어서 기도를 하는 것도 아마 믿지 않는 자들의 삶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믿는 자가, 곧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과 다른 정말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구별되지 않으면 우리가 세상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자비”입니다. 그것은 “인자”와 “긍휼”입니다. 이 점에서 제자들은 세상과 다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랑은 세상과 어떻게 다릅니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크게 세 가지를 하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 선대하는 것입니다. 선대한다는 것은 곧 선한 일을 하라 또는 선을 행하라는 말입니다. 셋째,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행하되 “원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크게 요약하면 “원수를 사랑하며 또 사랑은 하되 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넓은 사랑” 그리고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사랑”이 바로 제자들의 사랑이 세상의 사랑과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 아닙니다.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을 만한 착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했다고 해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도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인”이라고 하면 꼭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는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외인”들을 가리킵니다. 곧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 내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 내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대개 이런 사람들을 일단 “좋지 않은 사람” 또는 “죄인”으로 간주하고 의심합니다. 사랑하기는커녕 이들에게 친절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죄인들” 또는 나와 상관이 없는 “외인들”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죄인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자기에게 선한 일을 하는 자에게만 선을 행하고, 또 갚을 능력이 있고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빌려줍니다. 죄인들의 사랑은 엄격히 말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의무적인 거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가족간에도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먼 나라로 떠나 그곳에서 그 많은 재산을 창기들과 함께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마치 죽은 자식이 살아난 듯 반기며 그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인 형은 이를 싫어했습니다. 아버지도 밉고, 동생도 미웠습니다. 그래서 따지듯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나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는데 내게 염소 새끼 한 마리라도 주어 내 친구들과 즐기게 하신 적이 있었나요? 그런데 이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먹어버린 녀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군요!” 이 첫째 아들에게 있어서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도, 동생에 대한 사랑도, 사랑이 아니라 “의무적인 거래”이었습니다. 그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얻어먹지 못하고 열심히 일한 것이 억울했습니다. 그는 또 저 방탕한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송아지를 잡은 것이 분했습니다. 그래서 슬펐습니다.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즐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슬픈 일이 일어난 원인은 사실 아버지나 동생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첫째 아들에게 “진정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곧 “사랑할만하지 않은 자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 내가 사랑할 이유가 없는 자들, 내가 사랑하기 정말 싫은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 참된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곧 상대가 사랑 받을만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대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넘치는 사랑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35,36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또 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고 그 인자하심이 한이 없습니다. 그 한 없는 사랑으로 심지어 그 아들을 죽인 원수들까지도 품고 용서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숨겨진 진실입니다. 로마서 5:8절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곧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증거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세상과 구별시켜주는 것입니다. “대인은 소인과 다르나 소인과 화하고, 소인은 소인과 같으나 소인과 화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인은 소인들과 다르지만 그렇게 다른 소인들과 잘 어울려 사는데, 소인은 다른 소인들과 같으면서도 서로 잘 어울려 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다르시지만 그런 죄인들과 잘 어울려 사셨습니다. 그들과 같이 먹고 마시며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같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이 많으셔서 그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인들과 구별되는 유일한 길은 바로 그 죄인들을 품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며, 큰 자가 되며,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사랑의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사랑”에서 구별되는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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