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메시지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린도후서 5:16-2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6. 1. 8. 12:18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린도후서 5:16-21

 

고린도후서 5:20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간곡히 권면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이는 그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7). 다시 말하면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구원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일까요? 물론 죄와 죽음과 영원한 형벌로부터입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받은 구원은 우리가 본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으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살았으나,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이 구원의 은혜를 잘 이해하고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권면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성경 공부를 하는데 한 자매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 동안 아주 나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실까요?” 그렇습니다. 바울의 권면처럼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하게 지내고 싶어도, 이 자매와 같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실까?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실까?”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근심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받아줄까? 사람들이 나의 사랑을 받아줄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권하는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 (20)” 이 말씀에서 바울은 “권면”이니 “간구”니 하는 간절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들은 바울의 마음이기도 하거니와, 사실은 우리와 화해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하신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실까?” 하는 의심이 들 때, 같은 조바심과 간절함으로 우리와 화해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사신(messenger)”라고 부릅니다. 18절에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ministry of reconciliation)”을 받았다고 하며, 19절에는 “화목하게 하는 말씀 (message of reconciliation)”을 맡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희생하시고, 바울에게 이러한 직책과 말씀을 맡기셔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부르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님 자신이 또한 이 일을 위해 오셨습니다.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인 (witness)”입니다. 요한계시록 1:5절은 예수님을 “충성된 증인”이라고 하시고, 3:14절에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진리”를 세상에 전하시고자 이 땅에 오셨으며, 이를 증거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며 그만큼 “진리”입니다.

 

성경에는 “증거 (testimony)”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이 증거를 뜻하는 단어(marturion)로부터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순교자란 “진리를 증거하다가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일견 생각하면 “왜 진리를 증거하는데 꼭 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해적”이라는 재미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 보면 본래 해적이던 유해진이 바다를 떠나 산으로 가서 산적 무리와 한 패가 되었는데, 그들 앞에서 “고래”에 대한 증거를 합니다. 그는 눈을 좀 크게 그린 것을 빼고는 고래의 어떠함을 그가 본대로 사실대로 증거했습니다. 무지하게 크며, 이빨이 없고,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새끼를 낳고, 젖을 먹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황당무계한 증거”에 화가 난 스님이 그에게 목탁을 던지며 화를 내고 심지어 살생을 하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기껏해야 소금에 절인 “생선”밖에 본 적이 없었을 산적들에게 “고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있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산적들에게 고래를 증거하는 것은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큰 고난”이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어느 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그곳에 있는 한 손 마른 자의 병든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를 본 몇몇 악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꾀하였습니다. 이들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하찮은 병자”를 고치시기 위해 안식일을 범한다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친구하시고, 간음하다 잡힌 여자도 용서해주시고, 이방인이며 압제자인 로마 백부장의 기도까지도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증거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이들을 사랑하시고 영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멸치”밖에 본 적이 없는 자들에게 “고래”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황당무계하며 거짓말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 죽이려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증거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못박는 자들을 용서하시면서,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어떠하심을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심”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때 진정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시고 그녀를 도우십니다. 그녀는 “과거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수치심 가운데 외롭고 그늘진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물을 긷고 있는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거시고, 그녀를 친구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하나님의 선물 곧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선물은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딸로 영접해주시고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이전에 한 번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나쁜 과거”를 다 아셨고, 게다가 그 알고 계심을 그녀에게 밝히셨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들을 다 아시는 예수님 앞에서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주님께서 여전히 자신을 심하게 사랑하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기한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을 무겁게 억누르던 죄의식, 수치심, 두려움이 안개가 걷히듯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여자는 물동이를 우물 가에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소리쳤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것이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의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의 증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한복음 4:10). 하나님의 화해하심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내 죄를 생각하면 잘 믿어지지 않지만 “고래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목숨을 건 증거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통해 이미 우리를 영접하신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충성되시며 진실하신 증인 되신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