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메시지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 감사와 기도 (마가복음 7:24-29)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6. 1. 27. 12:49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감사와 기도

 

마가복음 7:24-29

 

어느 날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의 해안 도시이며 상업도시로, 이방인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가신 예수님은 한 집에 들어가셔서 자신이 그곳에 계신 것을 숨기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들은 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두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바로 이 딸 때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그녀의 간청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여인이 감당해내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틀림없이 자신을 로 비유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과 불쌍한 딸의 절박한 사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녀들의 배부름에만 신경을 쓰시는 듯 보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대답을 생각하면,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녀는 이제 돌아서서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여자는 대답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며 그녀를 축복하셨습니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보니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귀신이 떠나가고 아이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대답을 기쁘게 받으시고,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녀의 대답이 예수님께서 받으심직했던 것일까요?

 

그녀의 대답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앞부분 주여 옳소이다그리고 뒷부분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입니다. 우선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영접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개이고, 또 자녀들이 먼저 배불리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녀는 로서 주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주님!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속에 풍덩뛰어들었습니다. 한 마리 로서라도 주인이 베푼 상 언저리에 있게 된 것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소망스러운 눈으로 부스러기가 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떠나지 않고 여전히 거기 머물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정해주신 자리를 감사함으로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개처럼 낮은 자리일지라도, 감사함으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잃지 않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감사기도가 자주 함께 나옵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4: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골로새서 4: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심지어 물고기 뱃속에 갇혀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선지자 요나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이 말씀들에서와 같이 감사와 기도는 신자가 깨어서 영적 싸움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본다면, 우리에게는 감사 제목기도 제목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일들이 다 감사할 일이 아니면 기도할 일입니다. 우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들과 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심지어 그것이 내가 영접하기 힘든 것일지라도 아멘해야 합니다. 이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하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들으면서 자주 아멘하며 화답합니다. “아멘이란 말은 믿습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옳소이다,” “맞습니다또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so be it)”라는 뜻입니다. 은혜로운 설교를 들을 때 아멘하는 것처럼, 우리는 삶의 매 순간마다 항상 아멘해야 합니다. 심지어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아멘해야 합니다. 거기에 한치의 의심이나, 두려움이나, 염려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전적으로 옳소이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어려운 일에 직면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멘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마태복음 26:42)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아버지의 뜻이 옳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옳소이다함으로 개가 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나님께 옳소이다하심으로 흉악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신 모든 뜻과 계획들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도 않고 버려지지도 않도록 온 몸으로 받아 건져 올리시는 온전한 아멘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3:14)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온전히 옳소이다,” “아멘하지 못할 때, 사단은 그 틈을 파고듭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여자를 유혹한 것도 그 틈을 파고든 것입니다. 뱀과 대화를 하던 중 여자의 마음 속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먹지 말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옳소이다하지 못하고, “흠, 왜 이것을 먹지 못하게 하셨을까? 서운한데!하는 의문과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아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땅에 떨어뜨린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많은 절박한 소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원이 절박할수록, 의심과 염려도 심해집니다. 더구나 상황이 나의 기대와 반대로 흘러가면, 정신이 더욱 혼미해지고 이 가운데 많은 부정한 말들을 내뱉고, 어처구니 없는 실수들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문제가 절박한 만큼이나 강하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강하게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녀가 붙들 소망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거하며, 지혜롭게 행하며, 기도했습니다. 창세기 3장의 여자의 경우도, 설사 유혹에 빠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싶은 소원이 생겼더라도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실패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옳소이다하지 못한 것이지만, 더 큰 실수는 그 소원을 (그것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대신, 자신이 손을 내밀어 그 실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절박한 문제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이 절박함 속에 빠뜨리신 하나님의 섭리를 아멘하며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를 이런 절박함 속에 빠뜨리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하며, 나름대로의 살 길을 찾아 이곳 저곳 기웃거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감사함과 기도함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감사와 기도는 내 삶에 유혹자 사단의 출입을 막는 두 개의 문짝과 같습니다. 감사와 기도로 사단의 유혹을 물샐 틈 없이 완전히 차단해야 합니다. 또한 감사와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오르게 하는 두 개의 날개와 같습니다. 감사와 기도로 늘 새처럼 힘차고 가볍게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르는 우리 영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