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메시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6:5-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6. 2. 3. 09:48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6:5-6

 

성경의 마태복음 6 1-18절은 신자들이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하는데 있어서 가져야 할 근본적인 내적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에게 보이려고이런 일들을 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앞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와 기도와 금식하는 자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만 실제로 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보이는 것보여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런던에 가면 길거리에 특이한 공중화장실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특이한 이유는 밖에서는 화장실 내부가 보이지 않지만,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면 밖이 훤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화장실이 대로변에 있어서 지나가는 행인들이 많기 때문에, 옷을 벗고 일을 보면서 사람들이 바로 코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면 이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우리가 보는 것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보는 만큼 그들도 나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 안을 볼 수도 없고, 대부분은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의식도 못하며 스쳐 지나가는데, 화장실 안에 있는 나는 그들을 보고 의식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이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6:6절 앞부분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라고 합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다"는 말은 감추어진또는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보이지 않게계십니다. 그런데 6절 뒷부분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도 모르게 골방에 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앞에 말한 런던의 공중 화장실에서는, “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사람들은 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해서는, “나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를 보실 수 있으며 또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진리라면, 우리가 누구를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곧 우리 눈에 보이지만 우리를 볼 수도 없고 상관도 없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나를 보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이것이 진리이지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의식하는 삶은 여전히 극복하기 어려운 약점입니다. 왜 이런 문제가 우리에게 생겼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과 보여줄 수 있는 것을 통해서 삶을 살고 의미를 찾았습니다. 영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신하나님을 알 수도, 느낄 수도, 경험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은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한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12-14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마도 그들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1:29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어찌 보면 보여줄 수 있는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에게 매우 절망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앞에 인용한 말씀과 참 대조가 됩니다. 바울 선생은 말하기를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기도와 금식과 구제를 포함하여 보이는 육체의 자랑을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성령님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 곧 그리스도를 알고 얻는 삶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의문이 듭니다. “세상 사람은 의식하지 말아야 하지만, 적어도 교회 안에 있는 목사님과 형제 자매들은 의식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들에게는 존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글쎄요?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기 힘들게 하는 이들은 우리와 상관없는 세상 사람들보다는, 부모님, 목사님, 친한 친구들과 같이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이들의 판단이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고, 이들의 눈이 늘 가까이서 우리를 지켜보며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데 가장 방해를 많이 한 사람도 다름 아닌 수제자 베드로였습니다. 이와 같이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은 자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며,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리피스 토마스(Griffith Thomas)라는 분이 쓴 성령(The Holy Spirit)”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 종교개혁 이전과 이후를 비교한, 짧지만 매우 통렬한 말이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 곧 중세의 신학은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께로(through the Church to Christ)”인 반면, 종교개혁을 통해 회복된 성경적 원리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로(through Christ to the Church)”라는 것입니다. 제발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께로란 중세 가톨릭 교회의 기본 교리인데, 이를 통해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에서 정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육체의 자랑들을 쌓지 않는 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는 전혀 맛보지 못한 채 평생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두려움 가운데 그들의 생의 마지막 날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참된 성경의 원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로입니다. 즉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그리고 오직 은혜로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먼저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되며, 자연히 주님의 몸이며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의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식구가 되어서도 여전히 나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계속해서 머리 되신 예수님께 붙어있을 때만, 나의 생명이 보전되고 다른 식구들(지체들)과도 한 몸이 되어 조화롭게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9).

 

세상은 갈수록 영적으로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이 타락은 단지 술을 많이 마시고 음란한 짓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고, “보이는 썩어질 것들을 추구하고 이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뛰어난 과학 기술 문명은 보이는 것으로는 사람들에게 큰 자랑이겠지만, “영적으로는사람들에게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0절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우리가 보이는 것에 눈멀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에 눈 뜨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각자가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매일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고,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기를 기도합니다. 매일 그렇게 영적으로 깊어지고, 지혜로워지고, 강해져서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더 잘 보이는 우리 각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