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5
성경은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집니다. 구약이 “창조의 역사”라면, 신약은 “구속의 역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1장은 “신약의 창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신 것처럼, 요한복음 1: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특히 요한복음 1:1-5절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특히 “우리 영혼의 구원과 관련하여” 주님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우선 이 말씀은 “태초에” 계셨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영원함” 또는 “불변성”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 점을 여러모로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 1:24,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또 요한계시록 22:1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십니다. 세상의 학문은 늘 변하고 발전합니다. 오늘 진리였던 것이 내일은 진리가 아닐 수 있고, 오늘 옳았던 것이 내일은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은 영원하시며 불변하십니다. “구약의 말씀과 신약의 말씀이 똑같지 않으니 말씀이 변하는 것 아니냐?”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씀”이 변했거나 발전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이 더욱 분명하게 “계시”된 것입니다. 이에 관해 히브리서 1:1,2a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여기서 “말씀”을 지칭하는 성경 원문의 단어는 “로고스(Logos)”인데, 이 말의 일반적인 뜻은 “이성” 또는 “보편적인 원리”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우주만물의 조화롭고 질서 있는 운행을 보면서, 이것들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과 원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말씀”이 그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또 여전히 같은 "말씀"이 지금 그것들을 붙드시고 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3절은 “……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 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단순한 “이성”이나 “원리”를 훨씬 넘어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하십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이르는 길” 곧 “구원의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매우 특별한 것이어서, 우리가 하늘을 관측하거나, 인간의 도리를 연구하거나, 오랜 수련을 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삼위 하나님”을 가르칩니다.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장은 이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곧 2절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시고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하시므로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십니다. 창조역사에서도 그랬듯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구속역사”에서도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십니다. 성경학자들은 우리 사람들과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통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부 하나님 - 우리 위에 (over) 계신 하나님
성자 하나님 - 우리를 위해 (for) 계신 하나님
성령 하나님 - 우리 안에 (in) 계신 하나님
우리 입장에서 보면 달리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위해서 (for) 삽니다 - 성부는 우리의 목적 (End)
우리는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 (through) 삽니다 - 성자는 우리의 길 (Way)
우리는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by) 삽니다 - 성령은 우리의 능력 (Power)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렇게 도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좀 “죄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인 삶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목적이 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를 위해서 친구들이 저녁 시간에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만나서 처음 몇 분 그리고 작별 인사를 빼고는, 이 친구들이 내내 “돈 버는”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새삼 “돈의 마력”을 실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돈” 대신 “하나님 아버지”를 그렇게 즐겁게 생각하고, 그렇게 즐겁게 얘기하기를 원하십니다. 자다가 깼을 때 맨 처음 생각나는 분, 무심히 차창 밖 풍경을 내다보고 있는데 어느새 마음 속에 둥실 떠올라 계신 분, 좋은 일이나 힘든 일이 생기면 달려가 함께 나누고 싶은 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보여 주고 싶은 분, 그 분한테 칭찬을 받고 싶은 분, 언제나 만날 수 있을까 기다려지는 분, 그 분과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고 싶은 분, 자꾸 그 분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분…… 오늘 본문 말씀 1절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함께”라는 단어는 성경 원문에는 “pros”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와 함께“ 보다는 오히려 “~을 향하여”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주님께서 얼마나 간절하게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사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에게조차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태복음 8:33)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이신 예수님은 끊임없이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시며, 또 끊임없이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가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직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사신 것처럼, 성령님은 오직 “성자 하나님 곧 말씀”을 위해서만 일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씨가 땅에 뿌려지면, 생명의 기운이 역사하여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맸습니다. 하지만 오직 씨가 땅에 뿌려졌을 때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햇볕이 따스하고 땅이 기름지더라도, 씨가 뿌려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며 “우리 영혼에 뿌려져야 하는 씨앗”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없으면,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영접하고 “마음에 두면” 성령께서 그 말씀에 대해 역사하셔서 그 말씀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모든 좋은 일들이 나한테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말씀은 그저 “한 톨의 씨”일 뿐입니다. 그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다 들어있지만 (골로새서 2:3),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이 없으면 그냥 흰 종이 위에 쓰여진 까만 글자들일 뿐입니다.
4,5절 말씀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이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이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빛을 비추시고 (revelation) 생명을 주셨습니다 (redemption). “말씀”의 신비로움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신비로움은 오직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살 때” 그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살 때”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납니다. 죄인 된 우리를 거룩하신 삼위 하나님의 교제 속에 초대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 각자가 매일 “길 되신 예수님을 따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 일도매진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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