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메시지

한계를 극복하는 법 (마가복음 8:31-3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6. 2. 25. 10:56

한계를 극복하는 법

 

마가복음 8:31-38

 

한 자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나의 한계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슬퍼요!” 이것은 이 자매뿐 아니라 아마도 모든 크리스천들이 갖고 있는 고민일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한계가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오히려 한계를 인정하고 분수에 맞게사는 것이 올바른 처신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분수에 맞게살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뜻은 그 반대에 더 가깝습니다. 마가복음 11:23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하시고, 마가복음 9:23절에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시고, 또 요한복음 14:12절에서는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자부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 있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과연 이렇게 도전적인 말씀들이 우리에게도 유효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한계란 무엇일까요? 한계는 간단히 말해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죽을 힘을 다해 100미터를 15초에 달릴 수 있는 사람에게는 15초가 한계라고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100미터를 14초에 달린다면 아마도 죽거나 몸이 심하게 상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계란 그것을 넘으면 죽게 되는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한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죽음의 경계선입니다. 내가 그것을 넘어가면 죽기 때문에 그것을 넘지 못하고 그 한계 안에 갇혀서 슬프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를 전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합니다. 마가복음 8:31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말씀에 베드로는 놀라서 예수님을 만류하였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전혀 반대가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목숨을 보전하겠다고 한계죽음의 경계선을 넘지 않으면 오히려 목숨을 잃을 것이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그 한계를 넘어서면 목숨을 구원하게 된다는 겁니다.

 

죽음이 두려운 베드로에게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도, 이해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죽음너머에 아무런 좋은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 마시라고 예수님을 붙들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의 한계 너머에 있는 영광을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31)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38)을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의 한계 너머에 있는 이 영광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저편에 이렇게 놀라운 즐거움을 준비하여 놓으셨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담대히 그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시고 그 한계를 넘으셨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주시지만, 항상 그것을 한계 저편또는 죽음 저편에 두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계를 넘어서 그 영광에 이르도록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자유를 얻었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을 얻었습니다. 시편 23편의 기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주께서 베푸시는 상을 즐기며 아버지의 집에 영원토록 거한다고 노래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까요? 왜 꼭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 즐거움에 다다를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 38절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를 가리켜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이러한 세대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이 세상에 대해서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계를 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 대해 충분히 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도 누리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 칭찬받고 싶지만, 사람들 눈에도 부끄럽지 않은삶을 살고 싶습니다. 세상에 대한 이러한 미련 때문에 우리는 자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 부끄러운삶을 사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2,3).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신 것은 결코 주님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자신을 속건제물로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매우 사랑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으며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기에 무능력한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능력을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쓰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에는 강력(strong force)”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원자(atom)의 핵을 구성하는 입자들(양성자들과 중성자들)을 서로 묶어주는 힘이라고 합니다. 이 힘은 가공할 만큼 큰 것이어서, 이런 입자들이 분리하면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된다고 합니다. 원자력 발전소나 원자폭탄 같은 것들은 바로 이 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하심은 우리의 강력한 자기 사랑의 힘을 이제 주와 복음을 위해 방출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 자신의 부서지는 죽음의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한계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믿음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삶을 살 때, 우리는 핵발전소와 같이 지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때, 그 영광에 함께 참예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각자에게 보이지 않는 이와 같은 힘을 주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힘주십니다. 온갖 영적인 무기들로 우리를 무장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지어 죽음도 이길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무기가 됩니다. 믿는 자에게는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장벽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통로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한계가 없는 강력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