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잔치의 비유
마태복음 22:1-14
제가 대학생으로 처음 성경 말씀을 배울 때, 제가 속한 교회의 한 선배님은 성경의 역사를 자주 “태멘”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태멘”이란 창세기 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의 첫 글자 “태”와, 요한계시록 22:20절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의 “멘”자를 취하여 만든 말입니다. 곧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로 시작되어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세상이 끝나는 때가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완성되는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구원 역사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아들 곧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이 성경적 역사관을 우리가 이해하고 믿고 또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세상의 구원”이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 권면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설사 그 날이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죽고 나서 또 다시 수백 년이나 수천 년을 더 무덤 속에서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오시는 날 우리는 다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잠들어 있는 동안은 “시간”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것이 1초이든 수천 년이든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죽었다가 곧 잠들었다가 바로 깨어나면 이미 예수님께서 와계시고 우리는 주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먼 훗날이 아니라 겨우 수년 또는 수십 년 후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시는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의 비밀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천국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여러 비유들 중의 하나로 보통 “혼인 잔치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조금 어색하게 들립니다. 천국이 “어떤 임금이 베푼 혼인잔치”라고 하지 않으시고,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이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나님이시며, 또 “자기 아들”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천국의 중심에는 항상 왕이신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을 “위해서” 그 천국을 세우시며 다스리십니다. 골로새서 1:16절에 따르면 만물이 다 “그 아들” 곧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그 아들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왕 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천국을 이해할 수도 없고 당연히 그 천국에 들어가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혼인 잔치의 어떠함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어떤 자들이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가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대상이 당시에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핍박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자기 일에 바쁜 사람들”이며, 다른 한 종류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은 임금이 베푼 이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매우 심각한 결함들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종류의 사람들에 있어서 그 결함은 “왕”에 관한 것이며, 둘째 종류의 사람들에서는 “왕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부정적인 사례들”은 우리가 다가오는 천국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한 중대한 교훈들을 줍니다.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푸는 임금은 잔치 준비가 끝난 후 종들을 보내어 초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왠 일인지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하였습니다. 임금은 재차 종들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좀더 정중하게 초청하도록 일렀습니다. 또 왕이 이 잔치를 얼마나 잘 준비하였는지도 설명하도록 하였습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이렇게 간절하고 겸손하게 권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이 간절하고 겸손한 초대에, 사람들은 오히려 더욱 악하게 응답했습니다. 이들은 이 초대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중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자기 사업을 하러 갔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임금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들은 왜 임금의 은혜로운 초대에 대해서 그렇게 악하게 반응했을까요? 성경 해석자들은 이 이유의 단서를 주로 “자기 밭” 그리고 “자기 사업”이란 말에서 찾습니다. 왕이나 그가 베푼 혼인 잔치는 이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 밭” 또는 “자기 사업”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임금의 “왕 됨”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밭” 또는 “자기 사업”이 있었습니다. 곧 “자기 왕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기 왕국”에서 자신이 왕이 되어 살았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 살 때, 임금 곧 하나님은 그들의 왕권과 왕국을 위협하는 “원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겸손하고 은혜로운 초청을 싫어하고, 심지어 그가 보낸 사자들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이들의 악한 행동에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본래 초청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올 수 없게 되자, 임금은 종들을 거리로 보내어 만나는 사람들마다 모두 혼인 잔치에 초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종들이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만나는 대로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혼인 잔치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손님들을 보기 위해 잔치 자리에 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물었습니다. 임금의 질문에 이 사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하인들에게 명하여 그 사람을 바깥 어둠에 내어 던져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복”이란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7:9,10절 말씀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이 말씀에 나오는 “큰 무리의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 혼인 잔치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흡사합니다. 또 혼인 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예복을 입은 것처럼, 이 큰 무리의 사람들 또한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13,14절에서 한 장로가 사도 요한에게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묻고는 그가 또 대답하기를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합니다. 이 말씀들로 미루어보자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복이란 “예수님의 피로 씻긴 흰 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유구무언”은 보통 “완악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곧 회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여한 이 사람은 아마도 이렇게 완악한 마음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고집했던 것 같습니다. “나를 그렇게 간절히 초대하니 잔치에 참석은 하겠소. 하지만 옷은 내 마음대로 입을 것이니 상관하지 마시오!” 예복이 “예수님의 피로 씻긴 흰 옷”이라면, 이 사람의 옷은 길거리에서 입고 다니던 더럽고 허름한 누더기이거나, 심지어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3:18절은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를 “흰 옷”으로 단장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예복을 입히심으로 우리가 장차 있을 천국의 혼인 예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흰 옷을 입히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피를 흘리시고 그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이 흰 옷은 아무리 악하고 추하고 더러운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아름다운 신부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 흰 옷을 입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이 혼인 잔치의 영광스러움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에 따르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모두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임금은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악한 자”인지 “선한 자”인지 따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귀한 자”인지 “천한 자”인지도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곧 “예복을 입었는가”를 보십니다. 이것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씻김을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여 겸손히 순종하는 삶을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결한 신부가 될 소망으로 주님께서 오실 날을 간절히 기다리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의 왕”이시며, 그 아들 예수님은 “천국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을 왕으로 예배하며 그 아들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만이 이 행복한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지 않고, 예수님께서 법이 되시지 않는 천국 잔치를 우리는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잠시 동안 평안하고 자유로울지 몰라도 결국은 멸망 당하고 어둠 가운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천국 이야기는 우리에게 설렘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을 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만큼 오는 천국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경고하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희생하시고, 이제 우리를 성대한 혼인 잔치에 초청하십니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도 자기의 바쁜 일들을 내려놓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임금으로 예배드리며, 주님의 오실 날을 설렘과 경외함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천국의 혼인 잔치에 앉아 서로의 얼굴을 보고 기쁘게 웃고 즐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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