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한 엘리사 –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 (열왕기하 5:1-19)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8. 14. 04:02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한 엘리사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

 

열왕기하 5:1-19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아람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그 시대를 주름잡던 굵직한 인물들이 나옵니다. 주인공인 아람국 군대 장관 나아만과 더불어, 아람 왕(벤하닷)과 이스라엘 왕(여호람), 그리고 선지자 엘리사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진정한 주인공은 2절에 나오는 한 작은 계집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의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오늘 본문의 14절에 보면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이 치료되고 난 후 그의 살의 상태를 가리켜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란 마치 이 어린아이의 뽀얀 살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이 촛불시위와 대통령 탄핵으로 시끄러울 즈음에 인터넷 유튜브에서 순식간에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인기 있는 영상이 있었습니다. Robert Kelly라는 사람과 그의 딸에 관한 것입니다. Robert Kelly는 미국인이지만 한국인과 결혼하고 한국의 부산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는 교수입니다. BBC 방송은 한국의 급변하는 정치 상황을 보도하기 위해서 이 교수와의 원격 화상 인터뷰를 생방송으로 진행했습니다. Robert Kelly가 자신의 집 서재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열심히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4살짜리 딸이 신나게 춤을 추며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뒤를 이어 9개월 된 아들이 보행기를 끌며 따라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방안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습니다. 생방송 인터뷰중인 아빠는 당황하며 곁으로 다가선 딸을 밀어내고, 엄마는 놀라서 뛰어들어와 아이들을 급히 끌고 나갔습니다. 아빠는 예기치 않은 사고에 대해 연거푸 사과를 했지만, 방송사나 시청자들은 생각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삭막한 정치적 이슈들 가운데 끼어든 어린아이의 속살처럼 예쁘고 순수한 삽화였습니다.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저절로 번지게 하는 동화였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의 행적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에 따르면, 나아만은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이며 그 주인 앞에 크고 존귀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람이란 나라는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왕국으로, 지금의 시리아에 해당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시대의 아람은 강대국이었으며,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앗시리아의 공격을 이겨낼 만큼 강했다고 합니다. 아람은 또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열왕기상 22:1절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 년을 지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거의 항상 전쟁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나아만은 강대국이자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아람 왕국의 2인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자였던 것입니다. 이 난치병은 그가 갖고 있는 모든 부와 명예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파괴적인 불행이었습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치료의 소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아마도 그의 흉측한 피부를 위엄스러운 갑옷으로 가리고 다녔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왕의 군대장관이요 크고 존귀한 자였지만, 속으로는 살이 썩고 냄새 나는 문둥병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나아만의 집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잡혀 온 작은 계집아이가 종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놀라운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그녀는 아마도 문둥병이 얼마나 치료하기 어려운 병인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또 만일 그녀의 말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면, 주인을 희롱한 죄로 엄한 벌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 아이는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고 확신 있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에게 가기만 하면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칠 것입니다.” 놀랍게도 나아만은 이 계집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 들은 것을 자신의 왕에게 고하고, 마침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스라엘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이 여자 아이의 말을 그대로듣지는 않았습니다. 여자 아이는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나아만은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에게 곧바로 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작은 계집아이의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 길로 돌아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없었던 나아만은 많은 돈을 의지했습니다. 길을 떠나는 나아만은 은 십 달란트( 340kg)와 금 육천 개( 70kg)와 의복 열 벌을 준비했습니다. 나아만이 가지고 간 이 재물들을 오늘날의 화폐로 환산하면 약 50억원(4백만불)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나아만은 아마도 치료비로서 이 돈을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돈을 주고 사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돈으로 값을 메길 수 없이 귀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자가 아니시고 주시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어린 아이가 모든 것을 가지신 아버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유하신 아버지와 그의 은혜를 받아서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1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지 (receive)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람들은 자주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며 근심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한 일들과 내가 하나님께 드린 것들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이 은혜의 기초는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은혜의 기초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우리는 다만 어린 아이와 같이 그것을 받을 뿐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없었던 나아만은 권세자들을 의지했습니다. 나아만의 말을 들은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은 적어도 자기 나라 안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을 통해 선지자 엘리사를,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람 왕의 편지를 받아 읽은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괴로워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 줄 알라!” 이스라엘 왕은 세상을 통치하는 권력은 가졌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털끝 조차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나아만의 병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권세자들이 있습니다. 높은 지위나, 해박한 지식이나, 좋은 평판을 가진 유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권세자란 지푸라기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의지하는 것은 마치 지푸라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목사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없었던 나아만은 종교 의식을 의지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사는 왕에게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이에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말하자면 행차를 한 것입니다. 나아만은 아마도 엘리사가 몸소 나와서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인 그를 영접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밖에 나오지도 않고 사환을 보내서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전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나아만은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아픈 부위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영험한 선지자가 거행하는 성스러운 의식을 경험할 것이라는 그의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졌습니다. 심지어 선지자 엘리사의 얼굴 조차 보지 못하고, 다만 말씀만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사실은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시며 주님의 말씀입니다. “종교 의식이 절대로 아닙니다. “종교 의식이란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없었던 나아만은 또 좋은 시설을 의지했습니다.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을 전해들은 나아만은 그의 나라 수도인 다메섹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들인 아마나와 바르발을 생각했습니다. 이 가나안 시골을 흐르는 개천 같은 요단 강에 몸을 씻을 바에 차라리 더 크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다메섹의 강들이 훨씬 나아 보였습니다. 나아만은 저 강물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더 넓고 더 깊고 더 맑은 강물이라면 효력도 더 좋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것은 더 좋은 시설이 아닙니다. 믿음은 더 큰 교회나 더 웅장한 음악이나 더 화려한 조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예배 드리기보다는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없었던 나아만은 결국 그의 병을 치료받지 못한 채로 돌아갈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에 그의 종들이 나아와 그를 설득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이 종들의 말과 같이 엘리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저 믿고 요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담그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은 많은 돈이 필요한 것도, 세상 권세가 필요한 것도, 종교 의식이 필요한 것도, 좋은 시설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들은 말씀을 순종하여 그대로 하면 됩니다. 종들의 말을 들은 나아만은 요단 강으로 내려가 몸을 일곱 번 강물에 담갔습니다. 그러자 그의 살이 치료되어 어린 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그의 믿음을 받으시고 그의 병을 치료하신 것입니다.

 

비록 육체적으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일곱 번 강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나아만은 강물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마다 자신의 피부를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 몸을 강물에 담가보지만 피부에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 두려움과 초조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 번째 몸을 씻자 과연 선지자 엘리사의 말대로 그의 살이 회복되어 깨끗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섯 번 “No”를 하시다가 마지막 일곱 번째 “Yes”를 하시고 그를 치료하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No”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Yes”라고 하십니다.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은 이렇게 항상 그 자녀들에게 “Yes”라고 하시는 자애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보여드린 Robert Kelly 가족의 영상을 보면, 생중계 인터뷰를 하던 아빠는 갑자기 들이닥친 딸을 손으로 막 밀어내며 당황해 합니다. 놀란 엄마는 뛰어들어와 나가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끌고 나갑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 광경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이 재미있고 사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아빠의 “No”가 결코 “No”가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스러운 딸이 몇 분 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문을 열고 춤을 추며 아빠 방에 들어와 그 곁에 앉아서 종알거리고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딸은 아빠에 대해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빠는 항상 “Yes”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빠가 밀쳐내고 엄마가 끌어내도, 열 번, 백 번을 그렇게 해도 아빠는 항상 “Yes”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안에서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No”가 전혀 “No”로 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주님께 돌아와 안기고 또 안기고 또 안깁니다. 일곱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말입니다.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생각하면, 오늘 우리가 살펴본 나아만의 종교적인행동들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이기도 합니다.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 아버지께 향한 어린 아이의 속살 같은 믿음이 돋아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회복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