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라디아서 1:1-1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8. 28. 03:36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라디아서 1:1-10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의 첫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1,2차 선교 여행을 통해서 갈라디아 지방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이방인들이었지만 바울이 전한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이 교회들에 몇몇 유대인들이 가만히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크게 두 가지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인정된 사도(authentic apostle of Jesus)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전하는 바 할례와 같은 율법의 요구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거짓말들을 통해서 이들은 영적으로 아직 어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혼란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교사이며 목자인 사도 바울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인 복음으로부터 양들을 빼앗아 그 생명을 죽이려는 참으로 악한 행위였습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갈라디아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의 사도로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갈라디아 성도들 마음 속에 오직 믿음으로써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받아들이도록 설득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후 전도인으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따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평신도였지만, 저를 전도자요 선교사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열심히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가 전하는 말씀을 듣기보다 먼저 제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뭔가 눈에 보이는 증서타이틀이나 명함같은 것이 있으면,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목적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제가 신학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고자 했던 여러 이유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유명한신학교에서 유명한교수님들의 지도 아래 신학 공부를 마치고 직업 목회자가 된 지금,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제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전하면, “! 당신은 신학을 공부한 목사이니 당연히 그렇게 믿고 생각하겠지요!” 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만을 의지하여 전도인으로 살 때는 복음이 복음으로 전해졌었는데, “직업 목회자의 타이틀을 얻은 지금은 제가 전하는 복음이 목회자로서의 저의 직업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으로 쉽게 치부될 수도 있음을 봅니다. 상황이 오히려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저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매우 긴 소개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서 나타나는 소개들과 대조가 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에서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하고, 고린도전서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라고 합니다. 이런 소개들과는 달리, 갈라디아서에는 자신이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데 있어서 사람들의 영향이나 간섭이 전혀 없었음을 거듭 강조합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어떤 다른 사람들의 임명이나 승인을 받아서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한 바울의 사도직(apostleship)은 그가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authenticity)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11,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을 부르시고 그에게 복음을 계시하셔서 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 됨과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공언하는데 있어서 사람을 전혀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영향이나 간섭을 힘써 배격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보내셨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하며 축복합니다. “은혜와 평강은 바울 서신의 인사말에서 자주 나타나는 단어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습관적인 말들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은혜(grace)와 평강(peace)”이라는 이 두 단어는 기독교 복음의 전부를 함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일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은혜와 평강입니다. 구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가리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방패(shield)와 상급(reward)”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는 아브라함의 방패와 상급이 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복음의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 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이를 통해 평안에 이르게 하십니다. “평강은 아마도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목표가 아닐까 합니다. 유대인들은 평안을 뜻하는 샬롬(shalom)”을 인사로 사용했습니다. 절에 가면 가부좌를 하고 복스러운 얼굴에 평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열반(Nirvana) 완전한 평안(perfect peace)”에 이르기를 꿈꾸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복음은 그냥 평강이 아니라 은혜와 평강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한 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는 이 은혜 안에서 온전한 평안 곧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방패와 같은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떠나서는 평강도 없습니다. 이 은혜 밖에서는 사람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직 두려움과 절망과 죽음과 영원한 저주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설명함으로써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뿌리를 내리도록 씨름을 합니다.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바울의 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굵직한 항목들로 요약을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2:17)

  • 성령의 받습니다 (3:14)

  • 천국 유업을 이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4:4-7)

  •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삽니다 (5:1, 22)

 

이런 은혜들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다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한 패기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은혜(grace)란 단어는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gift)입니다. 따라서 은혜는 우리의 육체의 일(works)이나 우리의 공로(merits)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이 은혜의 은혜 됨을 해칠 뿐입니다. 또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perfect)합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복음의 말씀들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며, 그 열매는 온전하여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주며 하나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은혜 안에 거하면 완전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죽음의 환난한가운데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은혜는 생명싸개처럼 우리를 보호하며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평강은 영원하며 온전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축복이지만, 우리가 이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본래 이 악한 세대에 속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 악한 세대(the present evil age)”로부터입니다. 비행기는 이륙을 할 때 에너지를 가장 많이 소모한다고 합니다. 일단 이륙을 하고 나면 훨씬 쉽게 비행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젊어서 한 때 담배를 많이 피우다가 어느 순간에 담배를 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몇 주는 다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유혹 때문에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지나자 담배 냄새조차 싫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 악한 세대를 떠나 예수님의 은혜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처음 믿은 신자들은 이 악한 세대가 아직 그렇게 악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이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제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친한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선생님이신데다가 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유복한 집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동네의 건달 골목대장의 꾐에 빠져서 이 친구는 자기 부모님의 가게에서 몰래 돈을 조금씩 가져다가 골목대장에게 주었습니다. 친구는 이 잘못된 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따돌림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이 골목대장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에 동네에서 놀이에 참여한다는 것은 정말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녁 때 동네 아이들이 하는 게임에 늦지 않으려고 저녁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신발을 질질 끌며 쌩 하니 대문 밖을 내달리던 제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골목대장은 이렇게 모인 아이들을 줄을 세우거나 편을 가르고, 규칙도 정하고, 또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를 빼기도 합니다. 이것은 정말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자기 집에 아무리 맛있는 것, 재미있는 것, 좋은 식구들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동네 아이들의 놀이에 끼이지 못할 때, 그 따돌려진 아이는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것은 유복한 집의 막내아들인 제 친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이런 아픔과 두려움을 겪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심지어 부모님 몰래 돈을 훔치는 일까지도 말입니다. 가다머(Gadamer)라는 철학자에 따르면, “놀이는 그 참가자들의 진지함(seriousness)과 헌신(whole-hearted commitment)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만일 어떤 참가자가 건성으로 놀이에 참여하면, 놀이 전체의 흥과 재미를 망가뜨리는 자(spoilsport)로 찍혀서 따돌림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한두 사람을 희생양으로 찍어 따돌림으로써 나머지 참가자들의 놀이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놀이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데,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악한 세상이란 다시 말하자면 놀이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골목대장 곧 사단이 다스리는 이 즐거운 놀이터를 떠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로 다스려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지식이 없이는 은혜와 평강도 없습니다. 위에 요약한 은혜의 내용들은 우리에게 진기한 보화들입니다. 매일 깊이 살펴서 더 깊이 이해하고, 더 간절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각자가 복음의 지식에서 성장함으로써 더 깊고 강한 은혜와 평강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