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성령을 거역하는 죄 (마태복음 12:22-3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9. 12. 00:01

성령을 거역하는 죄

 

마태복음 12:22-32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아 알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목적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위해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성경 안에 있는 모든 사건들, 말씀들 및 기록들이 다 이 진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각과 방향으로, 곧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그를 통한 내 영혼의 구원을 마음에 두고 성경을 읽으면 그 안에 있는 말씀들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쉬울 뿐만 아니라 달콤하고 향기롭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닫힌 눈을 열어주고, 어두운 마음에 빛을 비추며, 잘못된 것들을 고쳐줍니다. 하지만 이 목적과 방향이 없이, 심지어는 이 방향의 반대 쪽을 바라보며 성경을 읽게 되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됩니다. 자신의 악한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성경 말씀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받을 형벌은 참으로 위중할 것입니다.

 

앞의 서론과 관련하여 오늘 말씀에서 제가 집중하고자 하는 요절은 31,32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서 인자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을 거역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만 성령님을 거역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것으로 고쳐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님도 하나님이신데 왜 예수님을 거역하는 죄는 용서가 되고, 성령님을 거역하는 죄는 용서가 되지 않는가?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또 이것이 서로 구분이 가능한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22절에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귀신 들려서 눈이 멀고 벙어리 된 자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시고 그가 말을 하며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다 놀라서 말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다윗의 자손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는 구원자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놀란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 일이 전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반응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생각이 그릇됨을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귀신의 왕이 자신의 식구인 귀신들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든, 동네든, 가정이든 자기들끼리 싸운다면 존속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28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며,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또 이 예수님의 일은 이 불쌍한 사람 속에 역사하는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신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의 죄는 성령을 거역하고 훼방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도 용서받을 수 없는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어떤 죄이며, 이 죄는 인자를 거역하는 죄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약의 사사기 6장에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미디안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이 사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 큰 일을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약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이 말씀을 들은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에게 주 되신 증거를 보여달라고 청하며, 그의 앞에 염소 새끼와 곡식 가루를 사용하여 준비한 제물을 드렸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를 이 제물에 대자 제물이 놓여진 바위에서 불이 나와 그것들을 살랐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는 사라졌습니다. 이것을 눈 앞에서 본 기드온은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깨닫고는 말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이 이야기에서 기드온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사자인지를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것을 눈으로 확인하자, 기드온은 자신이 이제 죽게 되었다며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기드온이 이렇게 죽도록 두려워한 것은 사람이 여호와를 대면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마치 마른 지푸라기가 맹렬히 타는 용광로 불 속에 던져진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는 기드온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지 않도록 보호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만날 때 아마도 사람의 모습을 했던 것 같습니다. 기드온은 여느 사람들을 만나듯이 그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또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주었을 때 그것을 바로 순종하지도 않았으며, 여호와께서 기드온과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실 때도 그의 정체를 의심하며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앞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즉각 죽음을 당할 수 있었는데, 기드온은 그런 여호와의 사자와 대화도 나누고 심지어 그를 진노하게 할 수 있는 여러 결례를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두려움이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위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사르자 기드온은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임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여호와 앞에 그대로 노출된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고 심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에게 긍휼을 베푸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고 겪었던 죽음의 두려움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가 특별히 큰 잘못을 한 것이 아닌데 왜 그렇게 심하게 두려워한 것일까요? 이는 그가 제물을 태우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을 대면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순식간에 심각한 죄인으로 만드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대면하면 보통 사람이 이렇게 심각한 죄인으로 곤두박질을 치는 것일까요? 안젤름(Anselm: 1033-1109)이라는 중세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범죄의 중대성은 그 죄를 누구에게 지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며 따라서 하나님께 지은 죄의 중대성은 무한하다고 합니다 (the importance of a crime is measured in terms of the one against whom the crime is committed, and therefore a crime against God is infinite in its importance). 기드온이 사람들 가운데 살 때, 심지어 여호와의 사자를 그냥 사람으로 만났을 때, 자신의 죄인 됨을 심각하게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는 이제까지 같은 죄인들 속에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자신의 죄의 무게를 온 몸으로 절감하며 뼈가 녹아 내리는 두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죄의 위중함은 그 자체의 내용보다도, 그것을 누구에게 저질렀는가 그리고 누구 앞에서 발견되는가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사람으로 기드온을 방문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도 육신으로 입고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셨을 뿐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더욱 낮아지셔서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겨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숨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어떤 일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하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를 드러내시는 이가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지팡이를 내밀었을 때 바위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불사르는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거나, 손을 대시거나, 진흙을 이겨 바르실 때 성령께서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신적인 역사들을 행하십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문둥병자가 깨끗해지고, 눈 먼 자가 눈을 뜨며, 중풍병자가 일어나며, 귀신들이 쫓겨나갑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를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증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에게 순종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 받는 과정 혹은 거룩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성령의 증거로 여호와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났을 때,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움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상을 불태우고 미디안 군대와 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또 성령을 받았을 때, 이전과 전혀 다른 파워풀한 전도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죄인들 중에 거하신 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은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그저 우리 중의 한 분으로 보고 거기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증거되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영접하고, 동시에 그 앞에 드러나는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2,3a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처럼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조금씩 조금씩 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일을 결정적으로 훼방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대한 성령의 증거를 거역하는 자입니다. 기드온을 예로 들자면, 바위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삼키는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엎드리기는커녕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저 불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라 마귀의 사자야!” 하며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기드온이 그랬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예수님을 직접 거스른 일은 없는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생애를 통해서 짓는 모든 죄들이 사실은 다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써 주님은 이미 우리가 저지르는 온갖 죄와 훼방속에서 고통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의 한없는 은혜로 우리를 참고, 용서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인큐베이터안에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아주 조금씩 하나님의 거룩한 빛에 노출되며 그만큼 우리의 죄를 벗고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본래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정결한 신부처럼 기뻐하고 춤을 추며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