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누가복음 12:13-2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9. 4. 03:29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누가복음 12:13-21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성 어거스틴은, “On Christian Teaching”이라는 그의 책에서, 사람에게 네 가지 사랑할 만한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나 자신, 셋째는 다른 사람들 (나의 형제, 이웃 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지나 건물이나 돈과 같은 재물들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관계 다이어그램.png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운데 표시된 라는 사람은 네 가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양 옆으로 대등한가치를 가진 나 자신과 이웃들이 존재하며, 또 아래로는 재물이 있습니다. 위 그림은 이상적인 관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위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내가 가진 재물을 잘 다스리고, 관리하며,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이상적인 관계가 깨어져 아래와 같이 되었습니다.

 

깨진 관계 다이어그램.png


창세기 3장과 4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범죄한 사건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건들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위해 지켜야 할 이상적인 관계가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범죄함을 인하여,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되어서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고 경배하며,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데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육적인 존재 (flesh being)’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이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 또한 이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6-40).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실 때, 그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아마도 그의 형이 부모님의 재산을 모두 차지했나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그리고 또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가르침을 보다 가슴에 와 닿도록 전하시기 위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그의 밭에서 나온 생산물이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쌓아둘 곳이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래 있던 곡간을 헐고 더 큰 창고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곡식과 물건들을 이 창고에 쌓았습니다. 그가 쌓아놓은 식량이며 물건들은 몇 년 동안 사용하기에 충분할 만큼 많았습니다. 모든 걱정이 없어진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지만 이런 그의 꿈은 환상에 불과했습니다. 이 부자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비유를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께서 그 뜻을 설명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성공한 사람이며,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아무 걱정 없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재산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바램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영혼도 지킬 수가 없었고, 따라서 그가 가진 많은 재산도 전혀 누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삶, 오직 자신만을 향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부자는 항상 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합니다. “내 곡간,” “내 곡식,” “내 물건등 그에게는 많은 소유물들이 있습니다. 또 자신을 영혼아!” 부르며 애지중지합니다. 그는 그의 마음 깊은 곳 곧 그 중심에 자신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경배하였습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마음과 성품과 힘과 뜻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게 되었을 때, 더 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또한 이런 행복을 얻기 위해 그는 많은 재물을 의지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곧 그의 생명을 도로 찾으시자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것을 즐거워하며 (enjoy), 또 어떤 것은 이용한다고 (use) 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워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용하는 것은 우리의 즐거움을 더욱 높이기 위해 그것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 그가 즐거워한 것은 바로 내 영혼이며, 그는 이 즐거움을 위해서 많은 재물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주 사람들은 즐거워해야 할 것과 이용해야 할 것을 올바로 구분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건강한 몸을 위해 음식을 먹습니다. 건강한 몸은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 즐거움을 위해 음식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강한 몸대신 음식에서 즐거움을 찾게 되면, 몸이 상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좋아하는 것을 편식하거나, 심지어 몸에 해로운 것을 마다하지 않고 섭취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건강한 몸을 위해 먹는 것을 잘 조절할 것입니다. 물론 먹는 것 자체도 즐거운 일입니다. 하지만 더 고상한 즐거움곧 몸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는 먹는 것을 관리해야 합니다. 때로는 먹고 싶어도 참고, 때로는 끌리지 않는 음식도 섭취하고, 심지어 필요하다면 금식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음식을 이용함으로써,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결과적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것을 즐거워하고 어떤 것을 이용해야 하는지를 잘 구분하여 고상한 즐거움(lofty joy)”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물론 그 답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입니다. 앞의 설명에 비추어 다른 말로 하자면, 지혜로운 자란 하나님에게서 즐거움을 찾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가장 고상한 즐거움 (loftiest joy)”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영혼의 존재인 사람에게 온전하고 참되고 영원한 즐거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온전하고 참되고 영원한 즐거움의 대상이 되십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에 집착하며, 또 그것이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덜 고상한 것을 즐거워하게 되면, 그것이 더 고상한 것을 망가뜨리게 됩니다. 앞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이, 음식을 먹는 데서 행복과 즐거움을 찾게 되면, 이로 인해 몸의 건강이 망가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것에서 즐거움을 찾게 되면, 이로 인해 하나님을 잃게 되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생명도 내 재물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면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내 모든 재산과 생명까지 버린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아무 것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덜 고상한 것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말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란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한 자입니다. 시편 42:1,2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이 저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가졌습니다. 이 갈증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나깨나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께 대하여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가수 백지영이 부른 오늘도 사랑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보고 있어도 그리워

같이 있어도 외로워

      …….

아마도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커질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가난해지고, 더욱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삼켜져 버립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이며,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을 물과 같이 쏟아서 주님께 드린 이유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말고도 사랑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 자신도 사랑하고, 형제와 이웃들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이들 사이에 마음을 나누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과 이웃들을 사랑하되, 이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하시며 주님의 양들을 부탁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또한 주님께서 이 양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세상을 나의 욕심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가치의 질서가 회복될 때, 우리의 눈이 뜨이고 우리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온전하고 참되고 영원한 즐거움의 대상이 되십니다. 사실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가장 큰 경배와 찬양으로도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가난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채우시고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