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생명의 떡 예수님 (요한복음 6:22-59)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9. 18. 03:33

생명의 떡 예수님

 

요한복음 6:22-59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기 위해 말씀하신 바 예수님께 대한 7가지 은유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를 학자들은 “7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I AM~)”라고 하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한복음 6:35, 48)

  2. 나는 세상의 빛이다 (8:12, 9:5)

  3. 나는 양의 문이다 (10:7)

  4. 나는 선한 목자다 (10:11)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7. 나는 참포도나무다 (15:1)

 

이러한 표현들은 단순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는 예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무엇이 되시는가?”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내가 믿고 따르며 의지하는 주님께서 내게 어떤 분이 되시는가를 알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세상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이 참으로 복 받은자임을 절실히 깨닫고 마음 깊은 곳에서 찬송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이중 맨 앞에 나오는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6장의 앞 부분에는 유명한 오병이어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입니다. 이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다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은 이유에 대해, 26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기적을 행하시는 이 분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런 의문을 가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이들이 관심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었습니다. 떡을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는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에게 다시 떡을 만들어주시는 대신 그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 양식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리라” (35).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51).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주님께 이 생명의 떡을 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어떻게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한다는 거지?” 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사실 이들의 냉담한 반응은 이해할 만합니다. 우리 또한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전에 다니던 신학교에 John Davis라는 교수님이 계셨는데, 이분의 말씀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현재의 세대(this generation)가 천국을 이 세상에서 찾는 최초의 세대라고 합니다. 즉 오늘날의 사람들은 오는 세상에 대한 소망은 거의 없고, 오직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천국 곧 궁극적인 행복(ultimate hapapiness)”을 추구하며 그것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때는 언제일까요? 아마도 청춘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외모가 멋있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에너지도 넘치고, 모든 것이 재미있고 신나는 때입니다. 식물로 비유하자면 가장 화사하게 핀 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꽃이 아름다운 만큼, 그것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도 아쉽습니다. 이 아쉬움을 사무치게 그린 노래가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신입생일 때 산울림이라는 그룹이 부른 청춘이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사람들은 세월을 거스르며 청춘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습니다. 하지만 꽃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겨우 며칠 늦출 뿐입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가장 행복한 때는 언제일까요? 그것은 꽃이 피는 봄곧 청춘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는 가을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5). 그리고 기쁨으로 거두는 열매란 영생입니다. 로마서 6:22절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우리의 삶의 여정은 꽃 같은 청춘을 즐기다가 허무하게 지는 것이 아니라, 일생 씨를 뿌리고 키우는 수고를 통해서 영생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고 영접하기가 좀 쉬워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길지만 한 가지 진리를 여러 다른 말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며 예수님의 살을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영생이라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며, 또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말씀하십니다 (39, 40, 44, 54). 곧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실 때 그 생명이란,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부활의 생명이며,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가진 자는 다시 죽지 않으며, 다시 주리거나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은 보다 구체적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음이라” (요한계시록 21:3-5). 이것이 성경이 예수님 안에서 약속하는 참된 천국이며 참된 행복입니다. 처음 것들, 곧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직 남는 것은 생명의 떡 예수님을 먹는 자들이 맺게 되는 영생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가을의 추수라는 한 가지 소망을 향해서 봄 여름에 온갖 수고를 하는 것과 같으며, 마라톤 선수가 면류관을 얻기 위한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 길고 고통스러운 레이스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외에 다른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달음박질을 무겁게 하려는 사단의 궤계임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얻습니까? 그것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이 떡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말씀합니다 (51).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나 저 말씀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설교 준비를 위해 참고가 될 만한 자료들을 찾아보니 대부분의 해설자들은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을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29) 하시고 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40) 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설명하기 보다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이라고 해야 더 나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incarnation)의 신비와 함께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본래 태초에 말씀(Word)으로 계신 하나님이신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이며, 동시에 육체를 가진 사람이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육체를 가진 사람이 되셔야 했을까요? 오늘 말씀에 비추어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성육신을 하신 것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말씀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으로 대표되는, 사람이 먹는 모든 음식들은 우리 몸 속에 들어가서 소화되고, 우리의 몸은 그것으로부터 생명을 유지하게 위해 필요한 각종 영양분들과 에너지를 얻습니다. 사실 우리 몸 밖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에너지들이 존재합니다. 햇볕도 있고, 불도 있고, 전기 에너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에너지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음식으로 먹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의 생명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먹을 수 있는 음식입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면, 우리 몸이 섭취할 수 없고 따라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소나 양들이 먹으면 살이 통통하게 오르는 풀도 사람한테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안됩니다. 사람은 오직 그의 몸이 먹고 소화할 수 있는 음식을 통해서만 에너지를 얻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란 예외 없이 한 때 살아있는 생명체였습니다. 즉 살아있는 식물이나 동물을 죽여서 그것으로 우리가 먹는 음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죽은 생명체로 만든 음식을 섭취하면 그것이 우리 속에서 몸에 생명을 주는 영양분이 됩니다. 굳이 말하자면, 죽은 생명체가 우리 몸 속에서 생명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생명의 떡이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살을 먹으면 그것이 우리 속에서 영생을 주는 생명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신이 되셨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영생을 주는 영의 말씀으로 다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들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선한 일들과 주님께서 전하신 모든 말씀들이 다 우리가 먹을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우리 영혼에 생명을 주는 최고의 음식들입니다. 우리가 먹어서 영생을 얻을 음식들을 주님께서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온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서 이를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반추한다(ruminate)”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본래 초식동물들이 이미 먹은 풀을 반추위(rumen)라는 곳에 저장시켜놓고 이것을 다시 입으로 꺼내 잘게 씹는 일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 풀 속에 있는 영양분을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어서, 풀만 먹는 들소나 기린과 같은 반추동물들은 고기를 먹는 사자보다 더 큰 몸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성경에 계시된 바 예수님의 복음에 관한 말씀들을 깊이 음미하며 끊임없이 반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말씀이 내 영혼에 생명의 양식이 되어서 내 안에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떡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몸 안에는 우리 영혼이 열매를 맺어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모든 신령한 영양분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것들을 한 마디로 은혜와 진리라고 요약합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이 신령하고 맛있고 기름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떡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매일 간절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 양식을 사모하고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을 먹고 마심으로 영생의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