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한 여자를 용서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8:1-11
오늘 말씀은 한 간음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일어난 격렬한 대결을 그리고 있습니다. 간음죄란 오늘 날의 “간통죄”에 해당하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결혼했거나 정혼을 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가진 행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이 잘못이 비록 비난을 받을지언정 법으로 처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간음을 매우 위중한 죄로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가 전한 십계명 중 일곱 번째 계명은 “간음하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0:14) 하며, 또 레위기 20:10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욥기에 나오는 의인 욥은 간음죄를 가리켜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 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 할 것이라”고 합니다 (욥기 31:11,12).
왜 지금은 처벌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 간음죄가 성경에서는 이렇게 위중하게 다루어지는 것일까요? 그 반대로도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성경에서는 이렇게 두렵고 무서운 죄가 오늘날에는 “범죄”로 여겨지지도 않는 것일까요? 이는 아마도 “관계(relationship)”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믿어집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모두 어떤 “관계”를 상정(assume)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 지켜야 할 도리들을 규정합니다. 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째 계명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에서 자녀가 부모님께 대해 지켜야 할 본분이며,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다른 계명들은 모두 “나와 이웃 사이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의무들입니다. “죄”란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도리들과 의무들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때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중요하게 여겨질 때, 그 도리를 저버린 잘못 또한 그만큼 위중한 죄로 여겨질 것입니다. 반대로 그 관계가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면, 그만큼 사람들은 더 쉽고 자유롭게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부부 관계를 포함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가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죄의식”은 더욱 무디어지고 이와 함께 “죄”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관계”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게 살아있는 관계를 통해서 사랑과 존경과 우정이 흐르며,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며 윤택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이런 관계를 병들게 하고 마침내는 죽이는 것입니다. 관계가 죽는다는 것은 곧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이며 둘 사이에 더 이상 아무것도 흐르지 않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특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매우 두려운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15: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의 생명”은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곧 주님과의 관계가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제자들은 자연히 건강한 삶을 누리며 많은 과실을 맺게 되지만, 그 관계가 끊어지면 그들은 “죽은 자”와 다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한 마디로 말하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 죽어있는 관계를 살리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자”입니다. 유대 사회의 법에 따라 이 여자는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의 서약을 깨뜨리고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또 “거룩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유대인 공동체를 더럽혔습니다. 게다가 “현장에서” 잡혔으니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절망적인 경우였습니다. 그녀는 너무 멀리 갔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시라도 그녀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녀를 구하시겠다고 손을 내밀었다가는 그녀와 함께 돌에 맞아 죽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불쌍한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들이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이를 통해서 예수님을 고소할 (accuse) 조건을 얻고자 해서였습니다. 이 살기등등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녀 혼자 죽도록 내버려 두시거나, 아니면 그녀를 변호하시다가 함께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집요한 질문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것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제야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이 예수님 앞에 홀로 서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하고 그녀가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이 불쌍한 여자를 구원하셨습니다. (1) 먼저 그녀를 무자비한 고소자들(accusers)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2) 그리고 그녀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3) 더 나아가서 그녀를 하나님 안에서의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죽은 관계를 살리시는 방법입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사단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에 빠뜨리고 이를 하나님께 고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2장에는 사단 마귀를 가리켜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하며 (12:9), 또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accuser)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라고 부릅니다 (12:10).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단은 정말 악한 존재입니다. 한 편으로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가 죄를 짓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 가서 우리가 한 잘못들을 낱낱이 고하고 이를 근거로 우리를 고소합니다. 사단이 이렇게 하는 목적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끊고 결국은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사단의 계략은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깨뜨려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입니다. 사실 사단 마귀의 책략은 우리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의 유혹에 약하며, 또 죄에 빠졌을 때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단 마귀의 궤계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매우 신실하시기 (faithful) 때문입니다. 이 관계를 살리시기 위해서 심지어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죄란 “타인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 문제는 혼자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해결을 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게 되는 어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자주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숨기다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다윗왕이 밧세바와 간음죄를 지은 후 그것을 숨기기 위해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죄를 짓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서게 된 것은 “큰 은혜”입니다. 이 여자가 현장에서 잡혔을 때 그녀는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녀는 예수님 앞에 끌려 나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녀를 정죄하고 돌을 던지는 대신, 그녀를 위해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고소하는 자들로부터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하시며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심으로 그녀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압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옮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중한 죄”를 용서하신 것은 값 없이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시고 자신을 살리시는 대신, 죄인과의 관계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신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워야 할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증거입니다. 죄는 관계를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악한 힘은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깨어지고 끊어진 관계를 살리는 유일한 능력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이 신실하신 사랑으로 하나님은 사단의 집요하고 악한 참소를 이겨내시고, 이 신실하신 사랑으로 우리의 뿌리깊은 죄를 용서하시고 치료하시며, 이 신실하신 사랑으로 우리가 죄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유와 진리와 생명에 이르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살리시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실한 사랑”입니다. 주님은 매우 겸손하셔서 간음한 여인과 만나시고, 대화를 나누시며,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이 “신실하신 사랑”이 우리의 “신실하지 못한 죄”를 드러내며, 동시에 그 죄를 용서하며, 동시에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을 갖게 만듭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주님의 사랑인지요! 우리의 모든 죄를 들고 나가 예수님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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