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를 물 위로 걷게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4:22-33
“당신은 삶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떤 연구자가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음, 삶의 의미는 행복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결국 내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글쎄요. 올바른 삶은 사는 것이겠지요? 나는 내 자녀들도 바르게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하고, 또 어떤 10대 청소년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해보고 싶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삶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일을 하는 겁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지만 사실 대답하기 쉽지 않고 이렇게 사람들의 생각도 다양합니다. “절대적인 삶의 의미”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어려울까요? 그것은 아마도 “죽음”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의미 있는 일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으니까요.
Steve Jobs는 Apple 회사를 설립하고 iPhone과 같은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여 사람들의 삶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췌장암(pancreatic cancer)에 걸려서 201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투병 중에 남긴 여러 명언들 중에서 자주 회자되고 인용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내가 곧 죽을 것임을 기억하는 것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거의 모든 것 – 모든 외부로부터의 기대들, 모든 자랑, 모든 실패의 두려움 – 이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 다 사라지며, 오직 정말 중요한 것만 남게 됩니다. 당신이 무엇인가 잃고 싶지 않은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이 생각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길은 당신이 언젠가 죽을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Steve Jobs의 말은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진지하고 진실한 성찰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심지어 이 깊은 성찰의 끝에서도 그가 “의미 있는 삶”에 대해서 세상에 해 줄 수 있는 조언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 (what is truly important)”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당신의 마음을 따라서 (follow your heart)”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이 두렵고 절망스러운 현실로부터 그가 얻은 지혜란 자신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는 이 지혜를 그의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아서 보다 의미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과연 이 깨달음과 그의 죽음 사이의 기간 동안 만족스럽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았는지, 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저는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는 배를 내려와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갑니다. 때는 밤 사경이었습니다. 밤 사경은 새벽 3~6시 사이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어둠이 깊고 아직 먼동이 트기 전입니다. 그 전날 저녁에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내신 후 자신은 육지에 혼자 남아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 없이 자기들끼리 배를 저어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은 바다 한 가운데서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높은 파도가 배를 위협했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유령이다!” 하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며 제자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 위를 걸어간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단지 “사람이 물 위를 걸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고, 베드로가 “죽음을 밟고 예수님께 나아갔다”는 사실 때문에 놀랍습니다.
작은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은 풍랑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서 어둠 속에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방향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안다고 해도 바람 때문에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사나운 파도가 계속해서 조각배를 뒤흔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오직 이 손바닥만한 작은 배에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딱한 사정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밤에 폭풍을 뚫고 와서 그들을 도와줄 수도 없었습니다. 사실 이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삶”을 비유적으로 정의한다면, “죽음의 바다 위에서 조각배를 타고 어둠 속을 이리저리 떠도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삶의 현실을 깨닫게 되면, 왜 “삶의 의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는 것이 어려운지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들은 “작은 조각배”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갇혀있는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무엇이 그들에게 의미가 있겠습니까? 밖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자주 “내 안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내 안에 있는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Steve Jobs도 “너의 마음을 따르라 (follow your heart)”고 합니다. “Listen to Your Heart (당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으세요)”라는 유명한 노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바다 위에 떠서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절망과 두려움”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바다를 걸어 그들에게 가까이 오셨을 때, 제자들은 주님을 반갑게 맞이하기는커녕, 오히려 공포에 사로잡혀 “유령이다!” 하며 소리쳤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내적인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사람은 밖으로는 “풍랑이 이는 죽음의 바다”에 갇혀 있고, 안으로는 “두려움과 절망”에 휩싸여있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는 “작은 조각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사치스럽고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는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이에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와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부활”만큼이나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안에서”가 아니고, 그가 몸담고 있는 “작은 배 안에서”가 아니고, 그 밖에서 곧 죽음 너머에서 그 죽음을 딛고 서계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이제 그 사람이 역시 죽음을 딛고 예수님을 향하여 몇 걸음을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사람이 어디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주님을 만나며, 주님을 알고 사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남과 사귐은 죽음에 갇혀있는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만남과 사귐은 죽음을 딛고 서서 나누는 영원하고 의미 있는 만남과 사귐입니다. 이 주님과의 사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립보서 3:7-9a). 바울은 세상 누구보다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선민 이스라엘 사람이며, 그 중에도 뛰어난 바리새인이며,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게 된 후 그는 이런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아낌없이 버렸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정의 끝에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준비하신 “생명의 면류관”이 있음을 믿고 힘써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베드로는 “오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도중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소리치자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존 번연(John Bunyan)이 쓴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이란 책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인 크리스천(Christian)은 멸망의 성(The City of Destruction)을 떠나서 하나님의 도성을 향한 순례의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절망의 늪(The Slough of Despond)에 빠집니다. 아직 무거운 죄의 짐을 등에 지고 있던 Christian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도움(Help)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그 늪을 빠져나옵니다. 늪을 빠져 나온 크리스천은 도움에게 묻습니다. “왜 천국 가는 길목에 있는 이 위험한 늪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입니까?” 그러자 도움이 대답합니다. “고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온갖 죄의 더러운 물들이 계속 흘러 들어오니까요. 수천 년 동안 수백만 가지의 좋은 교훈들을 쏟아 부었지만 이 늪을 메울 수 없었습니다. 다만 천국의 왕이 디딤돌들(steps)을 깔아두었습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그 디딤돌이 잘 보이지 않고, 또 사람들은 자주 머리가 혼미해져서 발을 헛디딘답니다. 그렇지만 이 디딤돌은 매우 견고해서 결코 무너지지 않는답니다.” 사람들을 “죽음”이라는 절망의 늪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백만 가지의 좋은 교훈들”로도 그 늪을 메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 하시자, 베드로는 이 말씀을 딛고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반석”입니다. 시편 40:1,2절 말씀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우리는 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 삶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내 안에도 없습니다. 그 삶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이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을 알며, 사귀게 됩니다. 이 사귐은 죽음이 삼키지 못하는 “영원한 사귐”입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이 축복되고, 의미 있는 삶입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의미 있는 삶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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