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민수기 13,14장)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10. 18. 02:31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민수기 13,14

 

우리가 오늘 공부할 말씀이 담긴 책을 민수기라고 부르며 영어로는 “Numbers”라고 합니다. 이 책을 이렇게 부르는 까닭은 이 책의 앞부분에 사람들의 숫자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 모세를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가족과 종족대로 세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를 세라고 하실 때 모든 사람들을 다 세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세라고 하십니다 (민수기 1:3). 출애굽기 12:41절에서도 애굽을 빠져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군대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전쟁을 하기 위한 군인으로 부르셨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뿐 아니라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하고 격려하며 (디모데후서 2:3), 빌레몬서 1:2절에서는 아킵보라는 사람을 소개하면서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자 (fellow soldier)”라고 부릅니다. 믿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전쟁을 위해 소집된 군인입니다. “군인의 삶일반인의 삶과는 매우 다릅니다. 특히 군인은 적을 대항하여 싸움을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에 대한 분노가 없거나 싸움을 못하는 군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전쟁을 위해 소집된 군인임을 깊이 자각하고, “싸움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인 민수기 13,14장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매우 뼈아픈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모세는 이스라엘 각 지파를 대표하는 12명을 가나안 땅에 보내어 그 땅을 탐지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이들 중 10명은 그 땅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 것은 그 땅에서 강하게 생긴 거인들과 견고한 성들을 보고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 중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하며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원망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한탄하셨습니다 (14:11). 그리고 20세 이상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다 소멸될 때까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목전에 두고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신에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백성에서 하나님의 군대으로 바뀌어가는 전환기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는 그 시작 부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한 모습이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군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지혜는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싸움을 하는데 있어서 소중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군인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싸워야 할 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비어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13:29절 말씀에 따르면 가나안 땅의 남쪽 지방에는 아말렉 사람들이, 산지에는 헷, 여부스 및 아모리 사람들이, 그리고 해변과 요단강가에는 가나안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가나안 땅 어디에도 비어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크고 강했으며, 그들의 성읍은 견고한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을 얻기 위해서는 이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지만, 그 안에는 원수에 관한 이야기도 참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3장에는 여자를 유혹한 이 나옵니다. 목가적인 시편 23편에도,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고 노래하며 시인에게 싸워야 할 원수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수를 마귀라고 하고 또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6:11, 12).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맞서 싸울 주적(主敵)이 누구인가?”를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한 후 이를 책망하시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사실 아담으로 죄를 짓게 한 근본적인 원수는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도 아닙니다. 그것은 뱀 곧 사단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두려운 나머지 누가 자신의 원수인지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주적은 바로 사단 마귀입니다. 원수궁극적인 적(Arch-enemy)”입니다. 믿음의 싸움을 할 때, 우리는 모든 문제들 뒤에 보이지 않게 숨어있는 원수 마귀의 존재를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싸움의 기본인 것입니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원수는 강하고 악한 적이며, 피할 수 없는 적이며,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원수 마귀의 존재로 인해서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삶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며 나아가는 삶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믿는 자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하였습니다. 13:18절 말씀입니다. “그 땅의 어떠함을 탐지하라. 곧 그 땅 거민의 강약과 다소와 그들이 거하는 땅의 호불호와 거하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 영웅인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전투에서의 승리는 오직 준비에 있다고 말합니다. 전투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을 잘 알고 또 이를 기초로 모든 있을 수 있는 상황들에 대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거민들의 장대함을 보고 그만 두려움에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나안 거민들 앞에서 메뚜기와 같다고 자조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또 말합니다. “지휘관의 첫째 요건은 냉정성을 갖는 것이다. 그래야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혼란에 휩싸이지 않고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원수의 가장 큰 무기는 두려움입니다. 사단이 쏘는 두려움의 독화살을 맞으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이렇게 되면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단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의 어떠함을 탐지하라고 하실 때, 그 목적은 단지 그 땅의 어떠함을 보는 것뿐 아닙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단히 원수 사단 앞에 세우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냉정하고 담대한 눈으로 사단의 궤계를 꿰뚫을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이렇게 훈련하십니다. 두려운 눈으로 보면 세상은 사나운 거인들로 가득한 정글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축복이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신자가 싸우는 믿음의 싸움이란 두려움을 이기고 사단의 궤계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고 쟁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 기본적인 필승의 전략이 필요합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그 전략은 수적인 우세였습니다. 곧 병력이 많은 쪽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실망스러운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 상식을 실전에 응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군의 병력이 적군에 비해 항상 많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적군이 집결하기 전에 급습을 하거나, 길게 늘어서서 이동중인 적을 공격하거나, 적의 일부를 고립시키는 방법들을 이용했습니다. 이런 전략들은 모두 수적인 우세라는 기본 전략으로부터 나온 응용 전략들입니다. 그러면 믿는 자들의 싸움에서의 기본 전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또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두려움에 빠져서 전쟁을 포기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정탐꾼들 중 두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이 말씀에 승리를 위한 명확한 지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리고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입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상황을 맞이하고 어떤 결정을 하든지 그들이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지휘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시며, 그 땅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우리 싸움의 승패는 수적인 우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적 싸움의 모든 전략들은 이 기본 전략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싸움을 싸우는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의 생명입니다. 정탐꾼들의 절망적인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이 새도록 소리를 지르며 곡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이 땅에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렇게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을 데리고는 결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영적 군인은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맡긴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오직 어떻게 이 싸움을 이길 것인가?”만 생각합니다. 나폴레옹은 휘하의 장군들이 회의를 지나치게 오래 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대개 오랜 회의 끝에 최악의 방책이 나오는데 그 최악의 방책이란 가장 소심한 방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장 소심한 방책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지휘관을 바꾸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군인이 전쟁의 승리보다 목숨의 보전을 앞세우면, 이렇게 소심한 방책들 곧 최악의 방책들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10). 우리가 주님께 죽도록충성할 때,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며 영원한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가리켜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합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적군은 원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입니다. 단지 먹고 소화하기에 좀 거칠고 단단한 음식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5:14). 군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은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이사야 9:3). 군인은 늘 이 즐거움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큰 원수를 만날 때나 큰 시련에 부딪힐 때, 우리는 놀라고 두려워하는 대신 마치 큰 사냥감을 만난 사냥꾼처럼 벅찬 마음으로, 승리를 위한 (잡아먹기 위한) 싸움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군사로 변화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싸움을 싸우며, 영생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