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로마 백부장의 기이한 믿음 (누가복음 7:1-1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8. 21. 05:42

로마 백부장의 기이한 믿음

 

누가복음 7:1-10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란 아마도 인간의 삶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보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틴 부버(Martin Buber)라는 유대인 철학자가 있는데, Ich und Du (I and Thou 한국말로는 나와 너’)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책은 사람들의 삶의 본질을 관계, 만남 또는 대화(dialogue)로 이해합니다. 곧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영어 번역본에는 “Primal Life Stand”라고 되어 있는데, 한국말로 번역하면 기본적인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Martin Buber가 기본적인 삶의 자세로 제시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I-Thou”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I-It” 관계입니다. 곧 사람들은 I-Thou의 관계, 만남, 대화를 하거나 또는 I-It의 관계, 만남, 대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I-Thou 관계는 상대방을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대합니다. 그리고 인격 대 인격의 상호적인 대화와 교제를 나누며, 자신을 이 관계에 헌신하고 복종합니다. 반면에 I-It 관계는 상대방을 하나의 객체로, 쉽게 말해서 물건으로 취급합니다. 그리고 일방적인 말이나 행위들을 가하며, 상대방을 관리하거나 통제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I-Thou 관계는 두 사람이 각각 교각(bridge pier)이 되고, 그 위에 든든한 관계의 다리를 놓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든든한 관계를 통하여 진정한 만남과 대화와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I-It 관계에서는 교각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다리를 놓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며, 일방적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만나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상대방을 수단으로 이용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며, 이를 위해 일방적으로 지시를 하거나 상대를 통제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한 로마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기이하게 여기시고 공개적으로 칭찬을 하실 만큼 놀라운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보여드린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이해해보려는 마음에 제 설교의 서론이 좀 길어졌습니다. 백부장이란 그 수하에 백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군 장교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군인입니다. 그 당시 로마 백부장은 높은 사회적 지위, 정치적 권력, 경제적 부를 누렸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백부장도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 유대인의 회당을 지어주고 또 유대인 장로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할 만큼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이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백부장의 높은 지위와는 달리, 그 당시의 은 사람으로조차 취급되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 주인의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 백부장은 그의 사랑하는 종을 위해, 예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이것은 오늘 이야기의 모티브이기도 하지만, 이 백부장의 믿음과 예수님의 은혜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병들어 죽어가는 이 종을 가리켜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백부장과 그의 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소유하고 소유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사랑하는관계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Martin Buber의 말을 빌자면, I-It의 관계가 아니라 I-Thou의 관계입니다. 물론 백부장은 주인으로서 종을 물건처럼소유하고,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 지금처럼 병이 들어 죽게 되어 더 이상 종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졌을 경우, 내다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에게 있어서 이 종은 그런 물건 (It)”이 아니었습니다. 백부장에게 있어서 은 자신과 똑 같은 성정을 가진 고귀한 인격이며, 따라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상대(Thou)였습니다. 비록 신분은 백부장과 종이었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관계는 I-Thou의 관계이며, 그 둘을 이어주는 다리는 진실한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관계로 종과 이어진 백부장은, 종이 아픈 만큼 자신도 아팠습니다. 이렇게 아플 때, 그는 이 관계를 힘들어하거나 끊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헌신하여 종을 섬겼습니다. 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는 종과 맺어진 이 사랑의 관계에 매우 충실하며 진실했습니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이 백부장은 이 종과의 사랑의 관계를 충실하게 섬기고 감당하는 또 다른 이었습니다.

 

백부장의 이러한 진실한 태도는 그가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I-It이 아닌 I-Thou의 관계 속에서 주님을 찾습니다. 백부장에게는 당장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어가는 급박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치료하실 수만 있다면, 단숨에 예수님께 달려가서 집으로 모셔와 종을 치료하시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백부장은 자신이 직접 주님께 가지 못하고 대신에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셔서 종을 치료해 주시도록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로들의 청을 들으시고 백부장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그는 다시 자신의 친구들을 보내어 말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를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백부장의 말을 생각하면,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경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다급한 필요를 따라서 예수님을 단지 병을 치료하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급히 집으로 모셔와 자신의 종의 병을 치료하시도록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의 전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자신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이 주님과 자신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I-Thou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관계 속에서 자신을 한 없이 낮추고 주님을 한 없이 경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집에 오시는 것을 만류한 백부장은 주님께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7b-8절 말씀입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 백부장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기이하게 여기시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후 그의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백부장의 종이 이미 건강해졌습니다. 과연 백부장의 믿음대로,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그의 병이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 종에게 그렇게 강력하게 역사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 되지 못하고, 허공에 퍼지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백부장에게는 그 말씀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죽어가는 종을 치료하고 구원하는 능력을 발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Martin Buber에 따르면, 세 가지 종류의 대화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진정한 대화” (genuine dialogue), 다른 하나는 기술적인 대화” (technical dialogue), 마지막으로 대화를 가장한 독백” (monologue disguised as dialogue) 입니다. 기술적 대화란 객관적인 지식을 전달하고 이해하기 위한 대화입니다. 교수와 학생이 나누는 대화, 의사와 환자가 나누는 대화 등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대화를 가장한 독백이란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것으로서 실상은 대화가 아닙니다. 이에 비해 진정한 대화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마음에 두고 살아있는 상호적 관계를 맺기 위한 진실한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하고 듣습니다. 이러한 대화의 여러 다른 모습들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가지만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자신이 하고 싶은 기도만 일방적으로 외쳐댑니다. 방언 기도, 철야 기도, 금식 기도, 통성 기도 가리지 않고 마구 쏟아냅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도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깝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과 그 말씀이 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질문도 많이 하고, 또 들은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진정한 I-Thou의 관계를 맺기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궁금한 것을 해소하고자 대화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능력이 아니라 지식으로 주어집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백부장은 예수님께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말합니다. 이 주님과의 대화에서, 그는 예수님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자기 집에 모시기에도 감당할 수 없는 하늘과 땅의 주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엄위한 군령과 같으며,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음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모두 말씀을 사랑하고, 또 말씀에 무한한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을 무슨 신기한 주문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이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나누시는 살아있는 대화입니다. Martin Buber는 하나님을 가리켜 영원한 당신”(eternal Thou)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영원한 당신되신 하나님과 진정한 사랑과 경배의 관계를 맺을 때,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I)”당신 (Thou)”으로 만나며 진정한 대화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이제까지 글로 읽던 성경 말씀들이 하늘을 울리며 땅을 진동시키는 창조주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에 능력으로 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