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자 (누가복음 7:36-5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9. 3. 25. 01:32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자

 

누가복음 7:36-50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예수님과, 그리고 예수님을 만찬 자리에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 그리고 시몬의 집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발을 눈물로 씻고 향유를 부은 한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그 마을에서 죄인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시몬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즉 매일 율법을 읽고 준수하며 장로들의 유전을 철저히 지키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 시몬이 볼 때, 불결한 여자가 남자인 예수님께 다가와서 그 몸을 만지고, 씻고, 향유를 바르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여자의 행동을 묵묵히 바라보시며 그 여자가 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기셨습니다. 시몬은 이런 예수님을 바라보며 속으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더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이런 시몬의 속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그 발에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그녀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의미를 보다 생생하게 느끼기 위해 유명한 영화 Titanic 속에 있는 몇 가지 장면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Titanic이라는 초호화 여객선이 처녀 항해를 하다가 빙산에 부딪혀 북대서양의 차가운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Jack이라는 서민 청년과 Rose라는 귀족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오늘 설교를 위해 제가 보여주고 싶은 장면은 1등실 승객들이 따로 모여서 주일 예배를 보는 모습입니다. 우아한 옷차림의 귀부인들과 신사들이 경건한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릅니다. 이때 Jack Rose를 만나기 위해 이 예배 장소를 찾아옵니다. 문을 지키고 서있던 사람은 Jack을 가로막고 서서 말합니다. 이곳은 1등실 승객들을 위한 장소이며, 3등실 승객인 Jack은 들어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밖에서의 소동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안에서는 여전히 경건한 찬송가 소리가 들려나옵니다. 초호화 여객선 내의 가장 깊고, 은밀하고, 아늑한 곳에, 그 고급스러움에 걸맞은 호화로운 교회가 있고, 또 그에 어울리는 우아한 귀족들이 따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철판으로 둘러싸인 이 거대한 여객선 내부의 가장 깊고 안전한 곳에서 밖에 경비원들까지 세우고 오직 소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모인 이런 예배 자리라면 굳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그들은 충분히 안전하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초대를 받아 가시게 된 바리새인 시몬의 집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시몬 또한 39절에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더라면이라고 속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 대하여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40절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시몬은 이렇게 예수님을 존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판단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종교가 예수님보다 훨씬 더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예수님을 존경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예수님을 깔보았습니다. 그의 종교에 따르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자는 죄인이었습니다. 또 그의 종교에 따르면 이런 죄인의 행위를 용납하시는 예수님은 선지자이실 수가 없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집에 초대되시는 장면들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과 더불어, 누가복음 11:37절에도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점심을 대접하는데, 이 때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자 이를 본 바리새인은 이것을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의 종교에 따르면, 이것은 정결 예식(ceremonial washing)을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누가복음 14:1절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두령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데 그 앞에 고창병이라는 병에 걸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치시는가를 가만이 엿봅니다. 그들의 종교에 따르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안식일 법을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고상하고 엄숙한 자신들의 종교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종교는 많은 날카롭고 엄격한 율법들과 규례들로 중무장되어 있어서 죄인들, 더러운 자들, 병든 자들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 높은 곳에 안전하고 평안하게 거하면서 죄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멀리하며 대신 자신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거룩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마치 Titanic호의 깊은 곳에 자리잡은 1등실 승객들만을 위한 예배실과 같았습니다. 그곳은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날카로운 종교의 벽으로 둘러싸인 교만한 위선자들의 소굴이었습니다.

 

Thomas Hardy라는 영국 시인이 Titanic호의 침몰에 관하여 “The Convergence of the Twain (둘의 만남)”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이 시에서 그는 사람들이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선박을 건축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빙산을 준비하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이 둘은 각각 항해를 시작했으며, 하나님께서 지금!”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때에 그 둘이 한 곳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매우 드라마틱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Titanic호를 만드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빙산을 준비하셨습니다. 비유적으로, 예수님에 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만드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리새인의 종교와 예수님이 부딪힌 것입니다. 그리고 Titanic호는 침몰하고 빙하는 계속 자기의 길을 가듯이, 종교는 침몰하고 예수님은 주님의 항해 경로를 따라 계속해서 길을 가신 것입니다. Titanic호 내부에 있는 예배실은 다만 Titanic이라는 세상의 일부일 뿐이며, 심지어 그 안에서 가장 “Titanic,” 다시 말해서, 가장 세상적인 공간일 뿐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도 계시지 않고 따라서 구원도 없습니다. Titanic호가 침몰하면서 함께 침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뜻밖에도 구원은 Titanic호의 밖에 있습니다. 그것은 빙하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입니다.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며, 세상에 속하여 함께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부딪히며 세상을 침몰시키는 예수님이십니다.

 

침몰하는 Titanic호에 있는 우리에게 구원을 길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침몰하는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로 완전히옮겨 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는 예수님께로 옮겨 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제 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사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37절은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라고 함으로 아예 이 여자를 죄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시몬을 50데나리온 빚진 자로 비유하신 반면 그녀를 500데나리온 빚진 자로 비유하심으로 그녀가 보통 사람들에 비해 열 배나 죄가 많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녀가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죄인으로 낙인 찍힌 그녀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매일 매 순간 칼에 베이고 바늘에 찔리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가장 큰 고통은 어느 누구와도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인 그녀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도 없고, 말을 걸 수도 없었으며,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습니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다 였습니다. 그녀의 진심 어린 애정도 사람들의 눈에는 불결한 치근덕거림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마음의 문을 닫고, 더 이상 진심을 세상에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생존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활동만을 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필시 그녀가 옷장 깊은 곳에 숨겨둔 유리병에 향유가 한 방울씩 채워지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예수님께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다(누가복음 7:34)”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예수님을 마음에 생각할 때, 그녀가 세상에서 겪었던 그런 두려움이나 조바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칼에 베이고 바늘에 찔리는 듯한 정죄의 고통이 전혀 없었습니다. 마치 봄날의 따스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듯이, 그녀의 마음의 닫혔던 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광야와 같던 그녀의 마음 속에 맑은 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이 홍수처럼 범람을 하면서 그녀의 마음 속 구석구석에 쌓여있던 온갖 아프고, 수치스럽고, 두려운 기억들을 휩쓸어버렸습니다. 그녀는 깊이 숨겨두었던 향유 병을 들고 예수님을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그녀 앞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아주 멀리서 보기만 해도 두려운 나머지 발길을 돌리던 바리새인 시몬의 집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섰습니다. 예수님 곁에 서니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머리털을 내려 예수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또 그녀가 온 마음을 들여 모아온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녀는 물을 붓듯이 자신을 예수님께 전부 쏟아 부었습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아끼지 않고 다 쏟았습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바리새인들의 수군거림도, “죄인이라는 손가락질도 그녀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녀가 완전히 예수님의 은혜로 배를 옮겨 탔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오직 예수님만 계시며, 오직 주님의 사랑의 법이 다스리는 세계입니다. Titanic과는 달리, 바리새인들의 종교와는 달리, 그 배 전체가 예수님이시며 그 배 전체가 예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만지고 있는 이 여자의 정체를 알지 못하시니 선지자가 아니신가 보다 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아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마음 속 생각까지도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음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에게 두 사람의 빚진 자가 있는데,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다른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모두 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돈 주인은 이들의 빚을 모두 면제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이 둘 중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시몬은 마지못해 대답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대답을 옳다인정하시고, 이 여자가 그에 비해 예수님을 얼마나 더 많이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44절 말씀에 따르면 시몬은 심지어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귀한 손님이 집을 방문하면 하인을 시켜 그 손님의 발을 씻겨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씻겨주지는 않더라도 발 씻을 물을 제공하는 것은 손님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식사를 위한 초대라면 더욱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고도 그렇게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습니다. 49절에 함께 앉은 자들이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만을 위한 자리도 아닌 것 같습니다. 시몬에게 예수님은 그저 많은 중요한 손님들 틈에 끼여있는 그렇고 그런 객들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달랐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전부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녀를 주님의 사랑하는 딸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죄인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이신 것입니다. 이 여자는 복음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님께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던졌습니다.

 

Titanic의 여주인공 Rose는 비록 죄인은 아니지만 온갖 까다로운 규칙들을 세세히 지켜야 하는 상류사회 속에서 숨막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지만 조금만 실수하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자유를 동경하며 가슴 속의 열정을 짓누르고 살아야 하는 Rose에게는 이런 삶이 고통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어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의 이런 시도는 Jack의 개입으로 무산되었지만, Rose는 다시 그녀의 인생 전부를 던지는 매우 과격한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바다에 뛰어드는 대신 평범한 청년인 Jack과의 사랑의 바다로 뛰어든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전부를 던지는 점프(Jump)였습니다. 그녀의 몸과 마음과 가족과 미래를 함께 던진 무모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를 둘러싼 온갖 겉치레들과 따가운 시선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결별하는 점프였습니다. 이제 오직 이 사랑만이 그녀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손에 넣게 된, 가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이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마저도 그녀에게 오직 Jack과 사랑의 기억으로만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사랑의 바다에 자신의 모든 것을 물처럼 쏟아 붓는 이 여자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Titanic 영화 감독이 필시 이 여자와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를 휴먼 러브 스토리로 각색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사랑을 가리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3:10).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마땅히 갚아야 할 빚이 있음에도 예수님은 오히려 그 빚을 덮어주시고 자유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찌르고, 베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날카로움이 없습니다. 심지어 죄인을 향한 사람들의 무정한 손가락질을 대신 당하시면서까지 죄인을 감싸시고 보호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나의 생명까지도 아무런 의심 없이 던져 그 사랑의 손에 맡길 수 있습니다. 평생을 오직 그 사랑 안에 머물며 행복하고, 즐겁고, 평안한 인생의 항해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믿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